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득지(得之), 호는 소봉(蘇峰)·이안당(易安堂). 김숙문(金叔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종(金綜)이고,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김원록(金元祿)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원국량(元國良)의 딸이다.
큰아버지 감찰 김원상(金元祥)에게 입양되었다.
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이해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을 거쳐 1603년에 대교가 되었다. 병조좌랑·정언·충청도도사에 이어 1613년 병조좌랑과 그 뒤 지제교·서산군수(瑞山郡守)·한성부좌윤·판결사·동지의금부사·부총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시키려는 폐모론에 극력 반대하다가 삭직당하였다. 인조반정 후 사간이 되어 인조의 사친추숭(私親追崇)의 잘못을 주장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척화신(斥和臣)을 적에게 보내자."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반대하는 소를 올렸으나, 인조의 동의를 얻음으로써 화를 부를 소지를 없앴다. 벼슬이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초서·예서에 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