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 ()

효종어필 칠언시
효종어필 칠언시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의 제17대(재위: 1649년~1659년) 왕.
이칭
정연(靜淵)
죽오(竹梧)
이칭
봉림대군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사망 연도
1659년(효종 10) 5월 4일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서울 경행방
관련 사건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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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효종은 조선의 제1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649~1659년이며, 인조의 둘째 아들이다. 병자호란 후 형 소현세자와 청에 볼모로 가 있다가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자, 돌아와 즉위했다. 즉위 후 대청 강경파를 중용해 은밀히 북벌계획을 세웠다. 김자점 일파가 이를 청에 고변했으나 국방 강화와 화포 개량, 군사훈련 강화 등 군사력 증진에 힘썼다. 그러나 두 차례의 나선정벌 외에 북벌 기회는 갖지 못했다. 대동법을 확대 실시했고 전세개혁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상평통보를 주조, 유통시켰고 역법을 개정해 시헌력을 쓰게 했다.

정의
조선의 제17대(재위: 1649년~1659년) 왕.
개설

재위 1649∼1659.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호(淏)이다. 자는 정연(靜淵)이다. 호는 죽오(竹梧)이다. 인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19년 5월 22일 서울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 서울시 종로구 종로3가 부근)에서 태어났다. 1631년 12세에 장씨와 혼인했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함께 비빈 · 종실 및 남녀 양반 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이듬 해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척화신(斥和臣)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형 곁에서 형을 적극 보호했다. 청나라가 산하이관(山海關)을 공격할 때 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고 자기를 대신 가게 해달라고 고집해 동행을 막았다. 그 뒤 서역(西域) 등을 공격할 때 세자와 동행해 그를 보호하였다.

청나라에서 많은 고생을 겪다가 8년 만인 1645년 2월에 소현세자가 먼저 돌아왔고, 그는 청나라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해 4월 세자가 갑자기 죽자 5월에 돌아와서 9월 27일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오랫동안 청나라에 머무르면서 자기의 뜻과는 관계없이 서쪽으로는 몽골, 남쪽으로는 산해관, 금주위(錦州衛) 송산보(松山堡)까지 나아가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철령위(鐵嶺衛) · 개원위(開元衛) 등으로 끌려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청나라에 원한을 품었다.

효종은 조정의 배청(排淸)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와 연결된 김자점(金自點) 등의 친청파(親淸派)를 파직시켰다. 그리고 김상헌(金尙憲) · 김집(金集) ·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등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해 은밀히 북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김자점 일파와 반역적 역관배(譯官輩)인 정명수(鄭命壽) · 이형장(李馨長) 등이 청나라에 밀고해 북벌계획이 청나라에 알려졌다. 그 결과 즉위 초에는 왜정(倭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남방지역에만 소극적인 군비를 펼 뿐 적극적인 군사계획을 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 대해 강경책을 폈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多爾袞)이 죽자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태도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 1651년(효종 2) 12월 이른바 조귀인(趙貴人: 인조의 후궁)의 옥사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청나라에 있던 역관배들도 세력을 잃음으로써 이듬 해부터 이완(李浣) · 유혁연(柳赫然) · 원두표(元斗杓) 등의 무장을 종용해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을 본격화했다.

즉, 1652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금군(禁軍)을 기병화했다. 1655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內三廳)에 통합하고 600여 명의 군액을 1,000명으로 증액하여 왕권 강화에 노력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강화하여 서울 외곽의 방비를 튼튼히 했다.

중앙군인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 명으로 증액하려 했으나 재정이 이에 따르지 못해 실패했다. 한편, 1654년 3월에는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束伍軍)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해, 인조 때 설치되었다가 유명무실해진 영장제도(營將制度)를 강화하였다.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保人)을 지급해 훈련에 전념하도록 했다.

서울 외곽의 방위를 크게 강화하려고 원두표를 강화도로, 이후원(李厚源)을 안흥으로, 이시방(李時昉)을 남한산성으로, 홍명하(洪命夏)를 자연도(紫燕島: 경기도 부천시)로 보내어 성지(城池)를 보수하고 군량을 저장하여 강화도 일대의 수비를 강화했다. 나선정벌 이후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지대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산성 등을 수리하는 등 군비를 적극적으로 확충했다.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Hamel,H.) 등을 훈련도감에 들여 조총 · 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보수했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화약을 얻기 위해 염초(焰硝) 생산에 전력했다. 뿐만 아니라 직접 관무재(觀武才) 등에 자주 참가해 군사훈련 강화에 힘썼다.

1655년 8월에는 능마아청(能麽兒廳)을 설치해 무장들이 강습권과(講習勸課)하도록 했다. 이듬 해 정월에는 금군의 군복을 협수단의(夾袖短衣, 검은 두루마기의 뒤를 터서 짧게 만든 옷)로 바꾸어 행동을 편리하게 하는 등 집념 어린 군비 확충에 노력했다.

그러나 재정이 이에 따르지 못해 때로는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효종의 군비 확충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국세가 이미 확고해져, 북벌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다만, 군비 확충의 성과는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에서만 나타났다.

효종은 두 차례에 걸친 외침으로 흐트러진 경제질서를 다시 확립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김육(金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1652년에는 충청도,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해 성과를 거두었다. 전세(田稅)를 1결(結)당 4두(斗)로 고정시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군비 확충에 필요한 동철(銅鐵)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전(行錢)의 유통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으로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유통시키는 데 노력했다.

문화면에서도 1653년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역법(曆法)을 개정했다. 태음력의 옛 법에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시켜 24절기의 시각과 하루 시간을 계산해 제작한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하게 했다.

1654년 『인조실록』을, 이듬 해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 간행했다. 그리고 공주목사 신속(申洬)이 엮은 『농가집성(農家集成)』을 간행해 농업 생산량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1656년에는 전쟁 후에 흐트러진 윤리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찬한 『내훈(內訓)』김정국(金正國)이 쓴 『경민편(警民編)』을 간행하였다. 이듬 해에는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해 간행했다.

효종은 평생을 북벌에 전념해 군비 확충에 몰두한 군주였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호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해 때로는 군비보다도 현실적인 경제재건을 주장하는 조신(朝臣)들과 뜻이 맞지 않는 괴리현상이 일어나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상훈과 추모

1659년 5월 4일 41세를 일기로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시호는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이다. 묘호(廟號)는 효종이다. 능호는 영릉(寧陵)으로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왕대리)에 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선원계보(璿源系譜)』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조선조 효종의 군비확충」(차문섭, 『단국대학교논문집』 1·2, 1967·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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