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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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설치된 중앙 군영.
내용 요약

수어청은 조선 후기에 설치된 중앙 군영이다. 1626년에 남한산성 축성을 주관하는 형태로 출발하였다. 정묘호란 이후 수어사(守禦使)라는 직함이 생기고 병자호란 이후 수어사 중심의 남한산성 수어 체제가 확립되었다. 몇 차례 조직 편제를 거처 경기도 속오군을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광주부의 남한산성을 신지(信地)로 하여 편제되었기 때문에 훈척중신(勳戚重臣)으로 임명되는 수어사와 광주부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1795년 정조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장용영을 설치하면서 사실상 폐지되고 명목만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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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설치된 중앙 군영.
개설

수어청의 설치에 대해서는 『속대전』에 1626년(인조 4) 남한산성을 수축해 청(廳)을 건설하고 광주(廣州) 등의 경기 진관을 적절하게 조절했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축성 당시의 기록에서는 설청한 사실을 찾아볼 수 없다.

내용

당초에는 경기병사 겸 총융사 이서(李曙)가 남한산성 축성을 주관하는 형태로 출발되었다. 정묘호란 후 1632년 무렵에 처음으로 수어사(守禦使)의 직함이 생기고, 1636년 병자호란 후에 수어사 중심의 남한산성 수어체제가 확립되었다.

인근 지방의 군사들이 산성에 들어가 지키는 속영체제(屬營體制)의 윤곽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1656년(효종 7)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서울 외곽인 남한산성을 수어하기 위하여 경기의 광주읍군(廣州邑軍) · 죽산진(竹山鎭) · 양주진(楊州鎭)의 3진과 강원도의 원주진(原州鎭) · 회양진(淮陽鎭) 및 충청도의 충주진(忠州鎭) 등의 1,600명을 일단 유사시에 방어사나 영장이 영솔해서 성으로 들어와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 뒤 몇 차례의 변화를 겪은 수어청의 조직 편제는 서서히 경기도 속오군을 중심으로 1704년(숙종 30)에는 이른바 3영(營) 2부(部) 체제로 군제가 변통, 개편되었다. 이 중 3영은 전 · 후 · 중영으로 각각 광주(廣州) · 죽산 · 양주에 설치되었으며, 그 조직은 공히 5사 25초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2부는 좌 · 우부로 각각 아병(牙兵) · 마병(馬兵) · 훈어마보군(訓御馬步軍) · 친아군(親牙軍)으로 구성되었다. 이 때 아병은 16초, 마병은 3초로 되고 훈어마보군 · 친아군은 숫자 미상이다. 이 3영 2부 체제는 1만 6500명의 군병과 사(使) 이하의 표하군(標下軍) · 군수노보(軍需奴保) 등을 합해 3만 2000명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수어청은 광주부의 남한산성을 신지(信地)로 하여 편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훈척중신(勳戚重臣)으로 임명되는 군사 책임자인 수어사와 행정 책임자인 광주부윤 사이에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어났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좌 · 우부 2부의 아병을 도성에 입번하도록 했던 경청(京廳)을 두고 남한산성을 관할할 때는 부윤을 부사(副使)로 임명하는 이원체제를 취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모순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광주부윤을 유수로 승격시켜 수어경청을 산성으로 옮겨 수어사를 겸하게 하는 일원체제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당인(黨人)들의 군사권 장악과 관련해 모순이 해결되지 않아 경청을 다시 두는 등 여러 차례의 변개가 이루어졌다.

그 뒤 1795년(정조 19) 왕권 강화와 관련되어 장용영(壯勇營)이 설치되면서 수어경청을 아예 폐지하고 산성으로의 출진(出鎭)을 영구화하였다. 이로써, 수어청은 사실상 폐지되고 광주유수의 직권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 수어청은 경군문에서 벗어나 기보군화(畿輔軍化)하였던 것이다.

변화를 자주 겪던 수어청은, 수어사를 광주유수가 겸할 때는 판관(判官)이 전영장을 겸한다든가, 말기에는 1영=5사 체제가 4사 체제로 바뀌는 변동이 있었으나 3영 2부 체제에는 변동이 없었다.

수어청은 다른 군영과 마찬가지로 경기 속오군을 중심으로 편제하고, 사 · 중군 · 별장 · 천총 · 파총 · 초관의 군사지휘 계통을 중심으로 하였다. 그리고 일단 유사시에는 남한산성을 신지로 하여 광주 · 양주 · 죽산 등의 속오군이 산성을 수어해 서울 외곽방어에 임했다.

그리고 좌 · 우 양부는 수어청이 서울에 있을 때는 별장에 의해 수도방위에 임했으나 그 군사는 호서아병(湖西牙兵)들이었다. 그러나 산성에 출진한 이후 좌 · 우부의 아병들은 모두 주1이었다. 단, 유사시에는 좌부별장=여주목사, 우부별장=이천부사에 영솔되어 산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수어청의 재정은 둔전의 개설, 불부조수미 또는 군수보(軍需寶) 등의 자체 경제 기반을 바탕으로 하였다. 더욱이, 정조 때 남한산성으로 영구히 출진했던 당시에는 경청에서 옮겨온 표하군 · 아병 · 별파진 · 훈어군(訓御軍) · 승군 및 각종 병종이 거의 수포군으로 바뀌었으며, 군관 명목에 속하는 병종이 무려 5,000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모두 불납미(不納米) · 불입번(不入番) · 불부조(不赴操)하는가 하면 미를 납부해 군역을 때우는 대우군(待遇軍)들이어서 정조 이후의 수어군은 사실상 그 명목만 유지하였다.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남한지(南漢志)』
『한국군제사-근세조선후기편-』(육군본부, 한국군사연구실, 1976)
「수어청연구(守禦廳硏究) 」상·하(차문섭, 『동양학』 5·9집, 동양학연구소, 1979)
「조선후기 중앙군제의 재편」(차문섭, 『한국사론』 9, 국사편찬위원회, 1981)
주석
주1

조련에 나아가지 않고 그 대신 미를 납부하던 군인

집필자
차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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