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해 행사용(行司勇) · 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 대북파에서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무인으로서 이서만이 정청(政廳)에 불참하였다. 그 뒤 장단부사로 경기방어사를 겸했고, 1623년 인조반정 때 김류(金瑬) · 이귀(李貴) 등과 함께 공을 세워 호조판서에 승진되고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완풍군(完豊君)에 봉해졌다.
이어 경기관찰사로 전임했는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관찰사로 부원수(副元帥)를 겸해 적을 추격, 송도(松都)에 이르렀으나,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으로 요해처에 웅거한 채 출전하지 못해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곧 다시 서용되어 완풍군에 봉해졌다.
이어 총융사(摠戎使)로서 왕에게 건의해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량을 많이 확보했으며, 삼혈총(三穴銃: 砲身이 세 개가 겹쳐있는 총)과 조총(鳥銃)을 많이 제조해 적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인조는 이서의 공을 높이 평가해, 경연(經筵) 특진관(特進官)으로 삼아 국방 문제를 항상 상의했다 한다. 1628년 형조판서를 거쳐 1632년에는 특명으로 공조판서가 되어 각처에 산성을 수축해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634년 판의금부사를 겸했고, 1636년 병으로 일시 사직했다가 곧 훈련도감제조를 거쳐 병조판서로 기용되어 군비를 갖추는 데 힘썼다.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영제조(御營提調)로 왕을 호종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지키다가, 이듬 해 정월에 적군이 겹겹이 포위하고 항복을 재촉하는 가운데 과로로 순직하였다.
무신으로 최초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독서를 좋아했고 효성이 지극했다 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또한 이서는 남한산(南漢山)의 형세를 살핀 후,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투시에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뜻을 읽고 인조에게 건의해 산성을 수축케 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남한산성의 온조왕묘(溫祚王廟)와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와 『마경언해(馬經諺解)』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