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공신 ()

조선시대사
제도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
제도/법령·제도
공포 시기
1506년(중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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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정국공신(靖國功臣)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 등은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燕山君)을 폐위시키고 그 이복동생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을 새 국왕으로 옹립한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성희안을 비롯한 117명의 관료들에게는 정국공신의 훈호(勳號)가 주어졌다. 그러나 중종반정에 별다른 공훈이 없거나 연산군 때의 신하들이 일부 책봉됨으로써 비판을 받았으며, 삭훈(削勳) 조치가 이어졌다.

정의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
책봉 배경

중종반정연산군의 폭정이 원인이 되어 발생했다. 특히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발생하여 부왕 성종(成宗) 때의 권신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화를 입었다. 결국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 · 박원종(朴元宗) · 유순정(柳順汀) 등은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국왕의 이복 동생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을 새로 옹립하였다.

책봉 과정

중종반정이 성공을 거둔 직후 박원종 · 성희안 · 유순정은 자신들을 배제한 채 101명의 정국공신을 3등으로 나누어 책정하였다. 1등은 유자광(柳子光) · 신윤무(辛允武) · 박영문(朴永文) · 장정(張珽) · 홍경주(洪景舟) 등의 5인, 2등은 운수군(雲水君) 이효성(李孝誠) · 심순경(沈順徑) · 변수(邊脩) · 최한홍(崔漢洪) · 윤형로(尹衡老) · 조계상(曺繼商) · 유순(柳洵) · 김수동(金壽童) · 김감(金勘) · 운산군(雲山君) 이계(李誡) · 이계남(李季男) · 구수영(具壽永) · 덕진군(德津君) 이활(李𤂾) 등의 13명, 3등은 고수겸(高守謙) · 심정(沈貞) · 채수(蔡壽) 등 83명이다.

공신 책봉의 대상이나 등급은 몇 차례 조정되었다. 우선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이 박원종 · 유순정 · 성희안 등의 공훈을 가장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건의하여 그들 역시 1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이로써 정국공신은 104명이 되었다.

하지만 공신 규모가 너무 컸다. 곧이어 국가 재정을 고려해 3등 공신 중 일부를 4등으로 격하하였다. 3등 83명 가운데 심정 이상 30명을 3등으로, 변준(卞儁) 이하 53명을 4등으로 구분했다. 또한 권균(權鈞) · 김준손(金俊孫) · 반우형(潘佑亨) · 이곤(李坤) · 우정(禹鼎) · 김무(金碔) 등 6명과 내관(內官) 문치(文致) · 서경생(徐敬生) · 김계공(金繼恭) · 김숙손(金叔孫) · 김은(金銀) · 임원산(任元山) 등 모두 12명이 4등에 추가되어 공신은 116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윤탕로(尹湯老)가 3등 공신에 추가 녹공되었고, 최종적으로 1등 8명, 2등 13명, 3등 31명, 4등 65명 등 모두 117명이 정국공신에 책록되었다. 조선 건국 이래 아홉 번째 공신 책봉이었는데, 1백 명이 넘는 책봉 규모는 처음이었다.

포상

정국공신에게는 각종 포상이 주어졌다. 우선 1등 공신은 3자급(資級)을 초수(超授, 일정한 승진 단계를 뛰어넘어 관직을 제수함)하였다. 그 부모와 처자에게도 관작(官爵)을 주어 3자급을 초수하되, 아들이 없는 이는 생질이나 사위에게 2계(階)를 초수하였다. 그리고 반당(伴倘) 10인, 노비(奴婢) 13구(口), 구사(丘史) 7명, 전지(田地) 150결(結), 은(銀) 50냥(兩), 표리(表裏: 옷감) 1단(段),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내렸다. 이하 2등∼4등 공신들도 등급별로 차이를 두어 자급을 올려주고 반당, 노비, 구사, 전지, 은, 표리, 내구마 등을 지급하였다.

책봉 이후 변화

정국공신은 책봉 직후부터 비판을 받았다. 반정 과정에서 상당수 종친과 대신들이 반정 세력에 참여하는 모습이 나타났는데, 심지어 연산군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구수영이나 반정 당일까지 연산군을 보필하였던 승지들마저 반정 대열에 합류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오사화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유자광도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즉 정권 교체의 과정에서 물러났어야 했던 연산군 때의 주요 신하들이 중종반정 이후에도 그대로 정계에 남았을 뿐 아니라 공신에까지 책봉된 것이었다.

정국공신이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 삭훈 조치가 이어졌다. 1507년(중종 2)에 유자광과 그의 손자 승건(承乾)이, 1513년(중종 8)에는 박영문 · 신윤무가 삭훈되었다. 그리고 1519년(중종 14)에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들이 정국공신 책봉을 두고 전례 없이 과하다며 상소하였다. 이에 2등 운수군 이효성 · 이계남 · 유순 · 김수동 등 8명, 3등 장온(張溫) · 이석번(李碩蕃) · 강혼(姜渾) · 김수경(金壽卿) · 윤탕로 등 12명, 4등 변준(卞儁) · 변사겸(邊士謙) · 한숙창(韓叔昌) · 성희옹(成希雍) · 홍경림(洪景霖) 등 56명이 삭훈되었다. 하지만 이때의 삭훈 조치는 그해 11월 기묘사화의 원인이 되었고, 사화 이후에 삭훈되었던 공신들은 다시 복적(復籍)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중종실록(中宗實錄)』

단행본

논문

송웅섭, 「중종반정 핵심 주동자들과 반정 경위에 대한 검토」(『조선시대사학보』 92, 조선시대사학회, 2020)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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