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최고본으로 이화(李和)에게 지급한 개국공신녹권이 있다. 고려시대는 위사공신(衛社功臣)·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그리고 공민왕대에 집단 인원별로 책봉된 공신에게 녹권이 발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 다수 인원을 집단적으로 공신에 책봉한 기사에는 공신녹권(鐵券이라고 함)을 반사(頒賜)했다 하고, 상작(賞爵)의 중요 내용을 열기한 경우가 많다. 특히, 후기의 것으로 회군공신(回軍功臣)·중흥공신(中興功臣)은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화녹권(李和錄券)은 공신제도를 이해하는 기본 자료로서 고려시대 공신 포상의 중요한 내용을 집성, 반영한 것이다. 조선 개국 후 공신책봉의 모든 절차와 제도적 기능을 체제화해 작성된 것이며, 그 뒤 공신제도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이화녹권에 등재되어 있는 중요 사항을 기재 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발급 관서: 공신도감(功臣都監), ② 녹권 수봉자: 공신호(功臣號: 純忠佐命開國功臣)·관계(官階: 崇祿大夫)·본직(本職: 商議門下府事)·겸직(兼職: 兼判義興親軍衛事)·작호(爵號: 義安伯)·성명(姓名: 李和), ③ 위 사람의 녹권 등재(開國功臣錄券)는 주장관인 별감이 모기(某期: 홍무 25년 모월 모일)에 도평의사(都評議使)에 의신(議申)하였음.
④ 포상하교(褒賞下敎: 太祖에 의함.)를 우승지(右承旨: 韓尙敬)가 구전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공적 내용을 서술하고 해당 인원의 명단을 공적 등차별로 등재하고, 유사(有司)는 위의 사람들을 차서(次序)에 따라 공신호와 포상의 의전(褒賞之典)을 거행하라는 것.
⑤ 그 내용을 복명해 몇 등 공신을 칭하고 각 등차 집단별 상전 내용을 명시하였음. 공신 개개인에게는 개인별 공적 사항과 예찬을 표기한 기공교서(紀功敎書)를 따로 작성해 분급하였다.
녹권에 명기한 상작 이외에 삼대조고(三代祖考)를 높여 가자(加資)할 일과 금대(金帶)·단자(段子)·견자(絹子) 등의 하사액을 등재하고 있다.
⑥ 위의 상사(賞事)를 선공감(繕工監: 立碑·立閣)·도화원(圖畵院: 圖形제작)·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紀功)·이조(吏曹: 封爵·蔭職·嫡長世襲·政案記事)·호조(戶曹: 給田)·도관(都官)과 전중시(殿中寺: 奴婢)·병조(兵曹: 丘史·把領의 入仕)에 분담하도록 명기하였다.
⑦ 이상의 결정에 이어 20여일 뒤 봉작석토(封爵錫土)와 사전(賜田) 노비액을 하교한 내용을 등재하였다. 개국공신의 경우 다시 4등급으로 하여 1등은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 등으로 전(田) 250결, 노비 30구, 2등 김사형(金士衡)·남은(南誾) 등은 전 200결, 노비 25구, 3등 이제(李濟)·이화 등은 전 170결, 노비 20구, 4등 정총(鄭摠)·오몽을(吳蒙乙) 등은 전 150결, 노비 15구를 차등 지급하였다.
⑧ 이상과 같이 하교한 일을 갖추어 녹권을 시행한다고 하고, 유관 관원의 수결(手決)을 관서별로 등재하였다. 이 때의 유사는 공신도감의 녹사(錄事) 2인, 판관 2인, 부사(副使) 2인, 사(使) 2인, 판사 3인과 이조의 좌랑(佐郎) 1인, 정랑(正郎) 1인, 의랑(議郎) 1인, 전서(典書) 2인, 그리고 주장관(主掌官)인 별감 3인이 연서하고 있다.
공신책봉의 제 과정은 왕조실록에 많이 서술되어 있다. 즉, 각 시대의 공신을 책봉하게 되는 전말과 공신녹권에 표기된 내용으로서 주장 관서인 도감의 설치, 공신 대상원의 절목 선정과 포상 절차 및 상작의 의정, 녹권의 작성과 이의 반사(頒賜), 예문관에서 공신호와 공신교서(功臣敎書)를 마련하는 일, 공신을 책봉하고 부대적인 행사로서 예조를 주장 관서로 하여 집행되는 공신회맹제(功臣會盟祭)와 공신연 및 제익일(祭翊日)의 반축례(頒軸禮: 入參功臣과 嫡長孫이 手決한 공신회맹록과 화맹제문을 頒賜받는 일)를 마치고, 참제신구공신(參祭新舊功臣)과 집사관(執事官) 및 백관이 전정(殿庭)에서 왕의 향연을 받는 사온사(賜醞事) 등 다양하다.
특히, 『녹훈도감의궤(錄勳都監儀軌)』는 해당 공신들의 책봉 전말을 일정별로 구체적으로 기록, 보존하여 공신에 관한 법전적 근거가 되는 구실을 하였다. 현재, 『소무공신의궤(昭武功臣儀軌)』로부터 몇 종류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초기 공신책봉의 통할 관서는 이조이며, 공신도감과 함께 양사가 주관하였다. 공신전담 관부로서 충훈부(忠勳府)가 설립된 이후 공신책봉이 필요할 때 녹훈도감을 개설하였다. 이곳의 주무자(主務者)는 도감관(都監官)이었다.
이들 전담 관서는 이조·예조 등 유관 관서와 연결, 모든 과정을 추진하면서 공신녹권의 반사와 그 부대 행사를 마칠 때까지 업무를 수행하였다. 따라서, 각 공신책봉의 전과정을 『녹훈도감등록(錄勳都監謄錄)』으로 작성하였다. 공신 관부인 충훈부에서도 『충훈부등록(忠勳府謄錄)』에 중요한 일들을 기록하였다.
조선시대는 개국공신을 비롯, 28회에 걸쳐 공신을 책봉하였다.
연산조의 위사공신(衛社功臣: 처음은 保翼功臣)은 선조 10년 전원이 삭탈 당하였다. 광해조의 위성공신(衛聖功臣)·익사공신(翼社功臣)·정운공신(定運功臣)·형난공신(亨難功臣) 등은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모두 폐적(廢籍)당하였다. 경종대의 부사공신(扶社功臣)도 영조가 즉위하자 폐적되었다.
이 밖에 추후에 삭탈 또는 적몰(籍沒)되어 공신호와 녹권을 잃은 자는 상당수에 달한다. 조선시대 실명공신의 총수는 국조공신록(國朝功臣錄: 영조대에 충훈부에서 편찬)에 따르면, 701인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