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때 찬성사(贊成事)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372년(공민왕 21) 8월에도 남경(南京: 지금의 난징)에 가서 채단(綵緞)을 보내준 것에 대해 사례하고, 다음 해 7월에 돌아왔다.
1377년(우왕 3) 8월에는 계품사(啓稟使)로서 북원(北元)에 파견되어 “원나라의 승상 나하추(納哈出) 등이 정료위(定遼衛)를 치려고 고려의 내원(來援)을 기다린다.”고 알려왔으나, 고려에서는 계절이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1385년 딸을 정혼시켰으나, 우왕이 혼인 전날 궁궐로 데려왔다가, 이후 안비로 삼았다. 안비(安妃)로 봉하게 하였다. 1388년우왕이 폐위되자 유배되었으나, 곧 방면되었다. 1391년(공양왕 3) 낭사 허응(許應) 등으로부터 기강을 문란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풍주(豊州)로 귀양갔으나, 조선 건국 이듬해인 1393년(태조 2)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