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양한재(養閑齋). 반정을 전후하여 한때 김수정(金壽正)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다시 김수경으로 고쳤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김적(金磧)이며, 영의정 김수동(金壽童)의 동생이다.
1482년(성종 13) 성균관유생으로서 원각사(圓覺寺)의 중들과 충돌한 죄로 장형(杖刑)을 받았고, 1495년(연산군 1) 돌아간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불사(佛事)를 반대하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뒤에 풀려나와 1498년 사평(司評)이 되었다가 공조좌랑으로 옮겼으며, 1506년 병조참지에 올랐다.
그 해 박원종(朴元宗) 등에 의해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형인 김수동의 뒤를 따라 반정군에 가담하여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영안군(永安君)에 책봉되었으나, 연산군 말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단상(短喪)으로 끝내고 이조판서 임사홍(任士洪)에게 구걸하여 벼슬을 얻은 데다 상중에도 조금도 근신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윤(李胤)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마전군수(麻田郡守) 등의 외직을 거쳤고, 1519년(중종 14) 영흥부사가 되었으나 그 해 조광조(趙光祖) 등이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할 때 녹훈이 지나쳤다고 지적되어 훈적(勳籍)에서 삭제되고 녹권이 박탈되었다가 기묘사화 후에 복직되었다. 그 뒤 장단·연안의 부사를 거쳐 1523년 이천부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