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답의 측량과 결복(結卜) · 두락(斗落)의 사정(査正), 전품(田品)의 결정 및 양안(量案) 기재 등 양전사무(量田事務)를 총괄하고, 특히 진황지(陳荒地)의 개간을 독려하기 위해 각 도에 파견되었다.
균전(均田)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전품의 공정한 사정에 따라 백성들의 부역을 균등히 하려 한다.”는 뜻을 나타내려는 데 있었다. 균전사라는 명칭은 임진왜란 뒤인 1612년(광해군 4)에 처음으로 보인다.
즉, 전란으로 황폐된 토지를 조사해 전세(田稅) 징수를 조정해야 한다는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의 건의에 따라 개량(改量)을 위한 균전사가 각 도에 파견되었다. 그 뒤 강원도와 삼남지방의 양전을 위해 양전청(量田廳)이 설치되었던 1717년(숙종 43)에 다시 도별로 분송(分送)되었다.
이후 균전사의 권한 등이 제도화되어서 영조 때 편찬된 『속대전』의 호전양전조(戶典量田條)에 명문화되었다. 이에 따르면, 균전사는 지방 수령을 감찰, 논핵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즉, 수령의 품계가 통훈(通訓) 이하면 스스로 처결하고, 당상관 이상은 조정에 보고하게 하였다.
또한, 양전할 때 실무를 담당한 사족(士族) 출신의 도감관(都監官)이나 감관 등의 부정 행위를 다스릴 수 있었다. 만약, 조정의 관리가 부정 혐의가 있을 때는 조정에 알리며, 법률에 저촉된 자는 균전사의 권한으로 처리한 뒤, 사후 보고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양전을 총괄하는 균전사의 임무는 막중하였고 그 권한도 강력하였다. 그러나 지방 실정에 어두운데다가 향촌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전품사정과 부세율(賦稅率)을 책정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때문에 감관이나 서리의 농간을 감독하기 어려워 균전사 파견의 성과는 크지 못하였다.
그리고 균전사는 국가 수입을 늘리기 위해 부세율을 마구 올리거나 진전(陳田) 등을 강제로 경작지라 하여 양안에 기재하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일반 농민들에게는 균전사가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중앙에서 균전사가 파견되었다고 하면 고을마다 소란이 일고 백성들이 동요하였다고 한다.
또한, 균전사 가운데는 공무를 빙자해 부정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1890년(고종 27) 말에 전라도 김제 · 고부 등 11개 읍에 진폐(陳廢) 전답개간과 농민 안집(安集)을 위해 균전사로 파견된 김창석(金昌錫)을 들 수 있다.
그는 이 지역 출신임을 이용, 이미 개간된 땅까지도 진전이라 하여 이를 다시 개간한 것처럼 허위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국가에는 면세를 청하고 실제로는 징세해 이를 착복하였으며, 일부의 땅을 자기 명의의 토지로 전용하는 등의 부정을 자행하였다.
균전사 김창석의 부정으로 인한 피해는 특히 고부지방이 심하였다. 따라서 1894년의 갑오농민 봉기( 동학운동) 때 “균전사가 폐단을 없앤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폐를 낳는다.”라는 폐정개혁(弊政改革)의 요구 사항으로까지 나타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