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 우홍(宇泓)의 아들로 우찬(宇纘)에게 입양되었다. 1878년(고종 15)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90년 호남균전관(湖南均田官)으로 있을 때에는 농정(農政)을 잘 보살폈다. 장지연(張志淵)의 『진휘속고(震彙續攷)』에 의하면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유작은 없다.
이 미디어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비스에만 활용하도록 허가받은 자료로서, 미디어 자유이용(다운로드)은 불가합니다.
항목 내용 중 오류나 보충하여야 할 사항을 상세하게 남겨주시면 검토하여 반영하겠습니다. 처리 결과는 의견·문의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미디어 또는 미디어 설명에 수정하여야 할 사항을 상세하게 남겨주시면 검토하여 반영하겠습니다. 처리 결과는 의견·문의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한 문의나 의견을 남겨주시면 검토하여 반영하겠습니다. 처리 결과는 의견·문의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용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남겨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용 시 아래와 같이 출처를 표시해 주세요.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