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은 조선전기 병조정랑, 한성부판윤, 장악원제조 등을 역임한 관리이다. 1439년(세종 21)에 태어나 1512년(중종 7)에 사망했다. 이시애의 난 때 자원하여 종군하여 서얼로서 벼슬길을 허락받고 세조의 총애를 입었다. 예종 때는 남이의 옥을 주도했고, 연산군 때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주석까지 달아 연산군에게 고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로써 여러 차례 공신에 녹훈되어 조정과 민간에 권세를 떨쳤다. 중종반정 때도 참여하여 정국공신에 올랐으나 대간과 홍문관·예문관의 잇따른 탄핵으로 광양으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갑사(甲士)로서 건춘문(建春門)을 지키다가,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종군했으며, 임금의 총애를 받아 특별히 선략부호군(宣略副護君)이 되었고, 서얼로서 벼슬길을 허통(許通)받게 되었다. 돌아와서 종군하는 데 작은 공로가 있다고 하여 병조정랑이 되었다.
1468년에 세조가 세자와 더불어 온양으로 행차할 때 총통장(總筒將)으로 호위하였고,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장원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다. 이어 호송관(護送官)으로 유구국(琉球國: 현재의 오키나와) 사자를 호송하였다. 이 해에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南怡) 등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 1등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1470년(성종 1)에는 응양장군(鷹揚將軍)에 봉해졌고, 열무정(閱武亭)에서 진법을 훈련하는 데 중상대장(中廂大將)이 되었다.
또한 예종은 유자광을 익대공신으로서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3계급을 뛰어올리게 하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했으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게 하는 등 친히 교서를 내려 위로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 유자광의 반인(伴人)이 난언을 고함으로써 서소(西所)에 구금될 처지에 놓였으나 대왕대비의 비호로 풀려났다. 그 뒤 숭정대부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1476년(성종 7)에는 한명회(韓明澮)를 모함한 것이 드러났으나 임금이 죄를 묻지 않았고, 1477년에는 대신들이 서얼인 유자광을 도총관(都摠管)에 임명할 수 없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도총관으로 삼을 정도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1478년(성종 9)에는 임사홍(任士洪) · 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현석규(玄錫圭)를 배제하려다 실패하여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에 “유자광(柳子光)은 사직에 공이 있으니, 공신녹권을 특별히 돌려 주라.”는 명에 의해 공신의 봉작만은 회복받았다. 1485년에는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이듬해에는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87년에는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또 등극사(登極使)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8년에는 북경에 갔을 때 구매했던 『역대명신법첩(歷代名臣法帖)』을 올렸고, 또 의주 및 동팔참(東八站) · 요동 · 광녕(廣寧) 등지에 있는 산천 · 도로의 형세와 지도(地圖)를 바쳤다. 1489년에는 장악원제조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석척기우제(蜥蜴祈雨祭)의 행향사(行香使)가 되었으며, 1491년에는 황해도체찰사가 되었다. 1497년(연산군 3)에는 무령군에 봉해지고, 이듬해에는 겸도총부도총관, 숭록대부 무령군에 제수되었다.
이극돈(李克墩)이 실록청당상(實錄廳堂上)이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金馹孫)이 쓴 사초에 자신의 나쁜 일을 쓴 것과, 또 세조 때의 일을 쓴 것을 보고 유자광에게 의논하자 곧바로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연산군이 이 말을 듣고 “이 나라에 충성한다.”는 말로써 특별히 칭찬한 뒤에 남쪽 빈청에서 죄인을 국문하도록 명하였고, 이에 옥사를 직접 맡았다. 또한 「조의제문(弔義帝文)」에 직접 주석을 달아 글귀마다 해석하여 연산군이 알기 쉽게 했고, 또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걷어다가 빈청 앞뜰에서 불사르게 하였다.
나아가 1498년에는 김종직과 제자들을 사초사건과 관련지어 크게 제거하는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후부터 유자광의 권세가 조정과 민간에 군림하게 되었다. 한때 1504년(연산군 10)에는 이극균과 사귀었다는 것으로 임사홍과 함께 직첩을 몰수당하고, 경기도에 충군(充軍: 군대에 편입함)되었으나, 곧바로 취소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때는 성희안(成希顔)과 인연이 있어 다시 훈열(勳列)에 참여하게 되어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에 봉해졌고, 겸영경연사(兼領經筵事)로 제수되었다. 이듬해에는 대광(大匡)으로 제수되어 충훈부당상이 되었으나 계속되는 대간과 홍문관 · 예문관의 잇따른 탄핵으로 중법에 처해져 마침내는 훈작을 삭탈당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이어 평해로 옮겨졌고, 정국공신의 호(號)마저 삭제당했으며, 그 자손도 먼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1512년(중종 7)에 눈이 멀다가 유배지에서 죽었으나, 이듬해에 ‘ 익대공신은 그 자신이 애쓴 공로이니 정국공신은 되돌려 주지 않더라도 익대공신만은 되돌려 주라.’는 조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