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3년(성종 4)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정난원(鄭蘭元)이 지금의 위치보다 남동쪽으로 떨어진 관학산 밑 감천변에 창건하였다. 1522년에 현감 태두남(太斗南)이 중수하고 1563년에 현감 윤희주(尹希周)가 지방유림과 더불어 보수하였다.
1609년(광해군 1)에는 잦은 수해(水害)로 인해 동쪽으로 이건하였다가 1837년에 이호직(李豪直)의 주장에 따라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민족항일기 말기에는 금산향교(金山鄕校)에 폐합되었다가 1946년 봄에 복원하였다.
폐합 직전에 개령면장 허신이 담장을 보수하고 1961년에 대성전을 개수하였으며, 1982년에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 명륜당 · 내삼문(內三門) · 외삼문(外三門) · 교직사(校直舍) 등이 있으며, 동재 · 서재나 동무(東廡) · 서무(西廡)는 여러 차례의 이건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개령향교 대성전에는 5성(五聖) ·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정면 4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노비 · 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 ·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 · 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