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관 ()

목차
관련 정보
홍문관지
홍문관지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궁중의 경서(經書) · 사적(史籍)의 관리와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서.
이칭
이칭
옥당, 진독청
내용 요약

홍문관은 조선시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와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삼사(三司)라 하였다. 옥당(玉堂)·옥서(玉署)·영각(瀛閣)·서서원(瑞書院)·청연각(淸燕閣)이라고도 하였다. 세조가 혁파한 집현전의 직제와 기능을 회복하여 1478년 학술·언론기관으로서 성립되었다. 연산군이 진독청(進讀廳)으로 개칭하였으나 1506년에 복구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홍문관과 예문관을 합해 경연청(經筵廳)이라 하였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궁중의 경서(經書) · 사적(史籍)의 관리와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서.
내용

사헌부 · 사간원과 더불어 삼사(三司)라 하였다. 옥당(玉堂) · 옥서(玉署) · 영각(瀛閣) · 서서원(瑞書院) · 청연각(淸燕閣)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시대에도 상문사(詳文師) · 통문박사(通文博士) 또는 서서원이 있었고, 고구려백제에도 박사의 제도가 있어 학술적인 관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홍문관의 연원은 중국 당나라에서 비롯되었다. 626년(당, 고조 9)에 당나라에서는 수문관(修文館)을 개칭해 홍문관이라 했고, 학사(學士)와 직학사(直學士)를 두었다. 직무는 도적(圖籍)을 수장(收藏), 정리, 교정하고 생도를 교육하며 조정의 제도와 의례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여러 관전(館殿)의 하나로서, 995년(성종 14) 숭문관(崇文館)을 개칭해 홍문관이라 했고 학사를 두었다. 1298년(충렬왕 24)에는 학사와 직학사를 두었다. 직무는 시종(侍從) · 시강(侍講)으로서, 문신 중 재학(才學)이 있는 자로서 겸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관전은 치폐(置廢)와 변동이 잦았다.

조선시대에는 학술적인 관부이자 언론 삼사(言論三司)의 하나로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이었으므로 홍문관원이 되면 출세가 보장되었다. 조선시대의 정승 · 판서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후 1463년(세조 9)에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장서각(藏書閣)을 홍문관이라 했는데, 이때의 홍문관은 장서기관(藏書機關)이었을 뿐이다. 1478년(성종 9)에야 비로소 학술 · 언론기관으로서의 홍문관이 성립하였다.

그 과정을 보면, 세조집현전을 혁파한 뒤, 집현전의 기능은 부분적으로 예문관에 의해 계속되었다. 세조가 젊고 유능한 문신을 뽑아 예문관직을 겸하게 하여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조처한 것이 한 예이다.

그러나 예문관으로는 과거 집현전의 기능을 완전히 대행할 수 없었다. 결국 1470년(성종 1)에 옛 집현전 제도에 의해 15인의 전임관(專任官)을 예문관에 더 둠으로써 예문관은 종래의 예문관과 구 집현전의 기능을 겸했다.

1478년(성종 9) 2월에는 직제도 집현전과 예문관의 복합체가 되었다. 이에 따라 예문관 분관(分館)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해 3월에 구 집현전의 직제를 예문관에서 분리해 당시 유명무실한 기관이던 홍문관에 이양함으로써 비로소 집현전의 직제와 기능을 이은 홍문관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그 뒤 1504년(연산군 10)에 홍문관을 진독청(進讀廳)으로 개칭하고 전임관을 없애고 예문관의 관원으로 겸하게 했으나 1506년(중종 1) 다시 복구하였다. 이후 이러한 체제로 계속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홍문관과 예문관을 합해 경연청(經筵廳)이라 하였다.

이듬해에는 이를 폐해 시종원(侍從院)에 속하게 했고, 그 해 관제 개정으로 경연원(經筵院)이 되었다가 1896년에 다시 홍문관으로 개칭하였다. 홍문관의 직제를 집현전의 직제와 대비하면 [표]와 같다.

[표] 홍문관 · 집현전 직제 비교

홍문관(弘文館) 『경국대전』 집현전(集賢殿) 『실록』
영사(領事, 겸)(정1품, 1명) 영전사(領殿事, 兼)(정1품)
대제학(大提學, 겸)(정2품, 1명) 대제학(겸)(정2품)
제학(提學, 겸)(종2품, 1명) 제학(겸)(종2품)
부제학(副提學)(정3품, 당상, 1명) 부제학(정3품, 堂上)
직제학(直提學)(정3품, 당하, 1명) 직제학(종3품)
전한(典翰, 종3품, 1명) 직전(直殿, 정4품)
응교(應敎, 정4품, 1명) 응교(종4품)
부응교(副應敎, 종4품, 1명)
교리(校理, 정5품, 2명) 교리(정5품)
부교리(副校理, 종5품, 2명) 부교리(종5품)
수찬(修 撰, 정6품, 2명) 수찬(정6품)
부수찬(副修撰, 종6품, 2명) 부수찬(종6품)
박사(博士, 정7품, 1명) 박사(정7품)
저작(著作, 정8품, 1명) 저작(정8품)
정자(正字, 정9품, 2명) 정자(정9품)

[표]에서 보듯이, 홍문관의 직제는 집현전의 직제를 거의 그대로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학 이상은 겸관(兼官)이고, 부제학 이하는 전임관이며, 부제학이 전임관의 수석관(首席官)이다.

홍문관은 청요직으로서 관원이 되려면 지제교(知製敎)가 될만한 문장과 경연관(經筵官)이 될만한 학문과 인격이 있어야 함은 물론 가문에 허물이 없어야 했고, 우선 홍문록에 올라야 하였다. 홍문록이란 홍문관원의 후보로 결정된 사람 또는 홍문관원의 후보자로 간선하는 일을 가리키며, 홍문관 · 이조 · 정부(政府: 廟堂)의 투표(圈點)를 통해 다득점자의 순으로 결정되었다.

홍문관원에 결원이 생기면, 홍문록 중에서 주의(注擬) · 낙점(落點)된 사람으로 충원하므로 홍문관원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홍문관의 직무는 궁중의 경적(經籍) 관리와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것이었다. 홍문관원은 모두 경연관을 겸했고, 부제학에서 부수찬까지는 지제교를 겸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기능은 집현전과 같이 학술적인 성격과 정치적인 성격을 아울러 가졌다. 특히 언론 삼사의 하나로서 정치적으로 큰 비중을 가졌고, 학문적 · 문화적 사업에도 주도적인 구실을 한 기관이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세조실록(世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중종실록(中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홍문관지(弘文館志)』
『통전(通典)』
『통지(通志)』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홍문록고」(최승희, 『대구사학』15·16, 1978)
「홍문관의 성립경위」(최승희, 『한국사연구』5, 1970)
「집현전연구」(최승희, 『역사학보』32·33, 1966·1967)
관련 미디어 (6)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