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각은 조선 왕조의 국가 사적을 보관하고 관리한 기관이다. 1908년 격하된 규장각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황실 도서관을 창건할 계획을 세웠으나 강제병합으로 중단되었다. 1911년에 구위대 수장서와 선원전 봉안 도서 등을 보관하는 이왕직 장서각을 건립하였다. 1915년 창경궁에 서고를 신축하고 장서각이라고 명명하였다. 6·25전쟁이 끝나고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으로 이관되었다가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이관되었다. 국왕의 고문에 대비한 기능은 상실하였지만 왕실 자료를 수집·정리·보존하는 도서관의 본래 기능을 수행하였다.
조선왕조에서는 궁궐 안에 전(殿) · 관(館) · 각(閣) 등을 세우고 많은 전적(典籍)을 모아 왕의 고문(顧問)에 대비하였다. 또한 역대 임금의 어제(御製) · 어필(御筆) · 어화(御畵) · 고명(顧命) · 유고(遺誥) · 밀교(密敎) · 선보(璿譜) · 세보(世譜) · 보감(寶鑑) · 장지(狀誌) 등을 봉안하는 기구를 두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집현전, 세조는 홍문관,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이후, 정조 때에 설치된 규장각이 궁내부(宮內府)에 부속되거나 규장원(奎章院)으로 그 지위가 격하되는 등 점점 그 본래의 기능이 쇠미해졌다. 이에 1908년(순조 2)에 그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당시 궁내부 대신 민병석(閔丙奭)에게 규장각 · 홍문관 · 집옥재(集玉齋) · 춘방(春坊) 및 4사고[四史庫] 등의 서적을 사간동(司諫洞)의 인수관(仁壽館)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서고를 신축하여 황실 도서관(皇室圖書館)으로서 장서각을 창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장서각 건립 계획은 경술국치로 일시 중단되었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황실령 제34호에 의거하여 황실의 사무를 관장하는 이왕직 관제를 새로이 제정하였다. 이로써 장서각을 건립하려던 고종의 계획은 일시에 이왕직 안의 도서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이때 규장각 및 사고의 서적은 모두 황실령에 따라 이왕직 도서과에서 관장할 수 있었다.
이 법령이 실행되기도 전에 '모든 도서는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이관시키라.'는 총독의 명령에 의거해서 1911년 3월, 취조국에 강제 접수되었다. 당시 취조국으로 인계된 내역을 살펴보면, 도서가 5,355종 10만 187책이며, 기록류가 1만 1,730책, 주자(鑄字)가 65만 3,921개 71분(盆), 판목(版木)이 7,501장(張), 기타 부속품이 12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왕직에서는 각 군영으로부터 모은 구위대(九衛隊) 수장서와 창덕궁 선원전(璿源殿) 봉안 도서를 취조국에 인계하지 않고 따로 보관하여 두고, 계속해서 새로 구입한 도서 3,528책과 무주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에서 이관한 도서 5,519책(4,606책이라는 설도 있음) 등을 선원전에 모아 장서각을 설치하였다. 이처럼 장서각은 조선 말기의 혼란기를 거쳐, 1911년 6월 19일 ‘이왕직 장서각(李王職藏書閣)’으로 건립되었다.
이 도서는 1915년에 창경궁 안에 신축된 4층 서고로 이전되었으며, 1918년에 와서야 비로소 새로 지은 서고를 ‘장서각(藏書閣)’이라 이름하였다. 1937년에는 창경궁 영춘헌(迎春軒) 북쪽에 위치한 이왕직 박물관이 덕수궁으로 이전하자, 장서각을 이곳으로 옮겼다. 1948년 광복 이후, 미군정청은 이왕직을 구왕궁 사무청(舊王宮事務廳)으로 개편하여 계속해서 장서각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장서각 도서는 소개(疎開)되지도 못한 채 많은 귀중 도서가 일실(逸失)되었다. 그 중 적상산 사고에서 이관되어 온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763권 900책(1,718권 823책이라는 설도 있음)이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국가 문서고(國家文書庫) · 중앙역사박물관(中央歷史博物館)에 수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55년 장서각의 관리는 구왕궁 사무청으로부터 창경원 사무소로 이관되었으며, 1961년 9월 13일에 이르러 비로소 일반에 공개되어 열람이 허용되었다. 그 뒤 1969년 11월 5일 대통령령 제4263호에 의거하여, 장서각은 창경원 사무소에서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으로 이관되었다.
이후 국학 연구의 총본산을 표방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개원되자, 장서각 도서를 이곳으로 이관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 결과, 1981년 대통령령 제10588호에 의거하여 장서각 도서의 전량이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옮겨졌다. 장서각 건물은 창경궁 안의 옛 자리에 지금도 남아 있다. 이 같은 변천 과정은 〈표 1〉과 같으며, 이때 인계된 장서각 도서의 내역은 〈표 2〉에 나타나 있다.
이관 연도\구분 | 장서기관 | 근거법령 |
---|---|---|
1908. | 인수관 | 고종령 |
1911. 1. 9. | 이왕직 도서과 | 황실령 34호 |
1911. 3. 30. | 조선총독부 취조국 | 조발 135호 |
1911. 6. 19. | 이왕직 장서각 | |
1945.11. 8. | 구왕궁 사무청 장서각 | 미군정 법령 제26호 |
1955. | 창경원 사무소 장서각 | 대통령령 제1035호 |
1969.11. 5. | 문화재 관리국 장서각 | 대통령령 제4263호 |
1981 |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대통령령 제10588호 |
〈표 1〉 장서각의 변천 과정 |
종류별 \ 종 · 책수 | 종수 | 책수 |
---|---|---|
한국본 | 12,297 | 42,562 |
중국본 | 1,151 | 27,313 |
일본본 | 1,431 | 13,662 |
고문서류 | 3,729 | 5,184(점) |
계 | 18,608 | 88,721 |
〈표 2〉 장서각 도서 종류 및 책수 |
장서각 도서의 구성은 설립 초기에 적상산 사고로부터 이봉(移奉)된 도서와 서울 각처 군영으로부터 구위대에 이관되어 온 군영 관계 서적을 모태로 하고, 그 밖에 황실에서 새로 구입한 도서와 창덕궁 안 선원전에 수장하고 있던 모훈서(謨訓書)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 뒤 6·25 이후 낙선재(樂善齋)에 보관 중이던 한글 소설류가 이관되었고, 1964년에는 칠궁(七宮)의 수장본, 1969년에는 봉모당(奉謨堂)에 보존되어 있던 역대 임금의 모훈서 등이 차례로 옮겨졌다. 그리고 1970년에는 종묘(宗廟) 및 여러 능재실(陵齋室) 등에 있던 전례(典禮) 관계 도서가 이관되었다. 이러한 도서들이 지금의 장서각 도서의 주축을 이루었다.
이 밖에도 장서각 소장 도서의 인기(印記)를 조사해 보면, 제실도서지장(帝室圖書之章) · 춘방장(春坊藏) · 종부시 제조인(宗簿寺提調印) · 종부시 제조지인(宗簿寺提調之印) · 종부시인(宗簿寺印) 등을 찾아볼 수 있어 제실도서관 · 춘방 · 종부시 등의 도서도 이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수장서는 주로 왕실 관계의 귀중 자료로 구성되게 되었다. 그 중 주요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조선태조 호적원본(朝鮮太祖戶籍原本) · 조온 정사공신녹권(趙溫定社功臣錄券) 등의 고문서류다. 둘째는 어제류(御製類)의 수고본(手稿本), 금 · 옥 · 죽책문류(金玉竹冊文類), 선원보류(璿源譜類), 종친류(宗親類), 돈녕보첩류(敦寧譜牒類) 등의 왕실 관계 자료다.
셋째는 각 사의 등록(謄錄) · 일기 및 의궤류(儀軌類), 넷째는 『청선고(淸選考)』 · 『정록(政錄)』 · 『문보(文譜)』 등의 관안(官案) 및 방(榜) · 보류(譜類)이며, 다섯째는 『북도각능전도형(北道各陵殿圖形)』 · 『궁궐도(宮闕圖)』 ·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 등의 도형류(圖形類), 여섯째는 궁체(宮體)로 쓰여진 한글 소설류 등을 들 수 있다.
장서각은 이미 주권을 상실한 시대적 상황에서 설립된 기구로, 자연 조선시대에 설립된 전 · 관 · 각과 같이 국왕의 고문에 대비하였던 주된 기능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장서 구성상에서 볼 수 있듯이, 왕실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 · 정리 · 보존하는 도서관의 본래적 기능에 더욱 치중했던 듯하다. 그 밖에 장서각이 설립된 이후, 장서의 증가에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도서 목록이 편찬되어 장서각 도서 구성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장서각에서는 여러 곳으로부터 도서가 이관되어 옴에 따라 도서 목록을 편찬하였다. 1914년에 『이왕가 도서실 장서목록(李王家圖書室藏書目錄)』 1책이 편찬되었고, 1918년 『이왕가 도서목록(李王家圖書目錄)』 3책이 증보 간행되었다. 또한 1924년과 1935년 두 차례에 걸쳐 『이왕가 장서각 고도서목록(李王家藏書閣古圖書目錄)』이 편찬되었다. 그 뒤 1970년 문화재 관리국 장서각에서는 당시까지 소장하였던 도서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 작업을 실시하여 장서각 총목록을 편찬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1971년 1월에 시작된 정리 작업은 1972년 5월에 완료되어 『장서각도서 한국판 총목록(藏書閣圖書韓國版總目錄)』이 간행되었으며, 계속해서 1974년 『장서각도서 중국판총목록(藏書閣圖書中國版總目錄)』과 1975년 『한국판보유편(韓國版補遺篇)』이 편찬되었다. 장서각 도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관된 뒤, 대부분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되어 귀중 자료의 보존 및 이용이 편리해졌으며, 학술 연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장서각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개원 이래, 한국학 관련 자료 및 인문사회 분야의 학술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하여 1999년 말에 일반 도서 27만 8,552책과 고서(고문서 포함) 10만 7,731책을 합해 38만 6,283책의 도서를 갖추었다. 또한 장서각은 1998년 SOLARS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도서관 전산화를 시작하였다. 그동안 정보통신부의 지원으로 1999년 말 소장 도서 전부를 DB화하여 수서 · 정리 · 대출 등의 업무와 자료의 이용을 디지털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다.
구 장서각은 1981년 6월 30일 연건평 2,460평에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신축한 건물이었으나, 2011년 7월에 신장서각이 신축 개관되면서 이원화되었다. 구장서각은 학술정보관이 되어 고전적자료, 일반도서의 서고와 수서실 · 정리실 · 열람봉사실 · 참고문헌실 · 정기간행물실 · 학위논문실 등의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반면 신장서각은 전체 면적 10,128.12㎡에 지상 3층 지하 2층으로 신축한 건물로, 족보 자료를 비롯하여 특수 자료 및 마이크로필름의 촬영 · 복제 · 현상 등 열람에 필요한 내부 시설을 갖추고 학문 연구와 교육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