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은 서울특별시 율곡로 99에 있는 조선 전기 제3대 태종 당시 건립된 궁궐이다.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처음에는 임금이 사는 궁궐인 법궁이 아닌 이궁으로 1405년 창건되었다. 이후 임금들이 창덕궁에 머무는 것을 선호해왔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복구되지 못하면서 창덕궁이 고종 때까지 법궁의 기능을 했다. 창덕궁은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다양하고 복잡한 왕실 생활을 반영하고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창건했지만 제2대 정종은 옛 도성인 개성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다. 제3대 태종은 개성에 남으려는 대신들의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1404년(태종 4) 다시 한양 천도를 결정하였다.
이 때 경복궁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새로 창덕궁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는 경복궁에서 있었던 정치적 사건에 대해 태종이 꺼려한 이유가 컸지만, 두 개의 궁궐을 동시에 운영하는 양궐체제가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405년 10월에 공사가 끝났으며, 10월 25일 창덕궁으로 이름 붙였다. 이 때 완성된 창덕궁의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이었다.
임진왜란 중 소실된 궁궐들 중 제일 먼저 복구를 시작한 것은 창덕궁이었다. 창덕궁이 먼저 복구된 까닭은 그전까지 임금들이 주로 거처하던 곳이 창덕궁이었으며, 경복궁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의견이 가세되었기 때문이다.
창덕궁 복구 공사는 선조 말에서 광해군 초까지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건하고 약 10년 후 1623년 인조반정 때 외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25년간 방치되었다가 1647년에 복구되었다.
이후 효종대에는 대비를 위해 수정당, 만수전 등이 건축되었고, 현종대에는 집상전이 건축되었다. 숙종대에는 제정각을 건축해서 각종 천문기기를 설치했고, 청심정, 영타정, 사정기비각, 능허정, 애련정 등을 지으면서 후원을 본격적으로 꾸몄다.
정조는 학문을 중심에 둔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각종 시설을 건축했다. 규장각을 중심으로 봉모당, 개유와, 열고관, 서고, 서향각 등을 세워 역대 임금의 자료와 새로 구입한 도서류를 보관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세자를 위한 공간도 크게 확장했다. 중희당과 수강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1803년(순조 3) 12월 선정전 행각에서 시작된 화재가 인정전을 비롯한 내전의 상당 부분을 불태웠고, 곧 재건공사가 시작되었다. 창덕궁의 마지막 대화재는 1917년 11월에 일어났다. 대조전 서쪽 행각의 온돌에서 시작된 화재는 내전 영역 대부분을 불태웠다.
복구공사는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등의 전각을 이건하는 것으로 주요 부분을 충당했다. 이때의 재건공사는 창덕궁의 원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또 자동차 차고와 전등, 탁자, 의자, 커튼 등 근대식 설비와 가구의 도입도 건축의 면모를 바꾸는데 일조했다. 대한제국의 황실 가족들은 창덕궁의 낙선재 영역에서 마지막까지 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