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에 창건되어 오랫동안 편전(便殿)으로 이용되다가 조선 후기에 내전의 희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별로 활용되지 못하였다. 당초에는 조계청(朝啓廳)이라는 건물이었는데 1461년(세조 7)에 선정전으로 개명하였다.
이 건물에서는 왕과 왕비가 크고 작은 행사를 벌였는데, 성종 때 왕비는 이곳에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고 친히 누에를 치는 일을 모범으로 보였으며, 왕이 주연을 열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때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적에 소실된 것으로 추측되며, 1647년(인조 25) 창덕궁 중건 때 다시 중건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 1674년(현종 15)에 수리한바 있고, 1803년(순조 3) 12월에 선정전 서행각(西行閣)이 소실된 것을 다음해 12월에 복건(復建)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장대석으로 월대(月臺)를 쌓고, 상부를 모난 박석을 깔아 마무리하고, 양끝에 드무(넓적하게 생긴 독)를 놓았다. 월대 위에는 장대석 한벌대의 기단을 쌓고 원형의 다듬은 돌초석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내부 앞쪽에만 고주(高柱)를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면·후면과 측면 어간에는 띠살창호의 4분합을 달고, 측면 전후 툇간에는 2분합을, 동·서 전툇간과 후면 동측칸에는 2분합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공포는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삼출목(內三出目)으로 살미첨차는 가냘픈 2개의 앙서(仰舌)와 1개의 수서[垂舌]로 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초제공만 살미가 첨차같이 된 교두형(翹頭形)이고 그 위에는 초각(草刻)되어 퇴보[退樑]를 받치고 있다. 대들보[大樑]·퇴보·충량(衝樑)은 윗몸에 붙여 우물천장을 가설하였고, 어간 후면 대량간(大樑間)에는 장방형의 보개(寶蓋)를 달았다.
단청은 안팎 모두 모루단청이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용마루 양끝에 취두(鷲頭 : 매의 머리모양 장식)를, 내림마루 끝에는 용두(龍頭)를 놓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 : 龍頭나 鬼頭 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창덕궁 안에는 청기와를 덮은 건물이 몇 채 있었으나 현재는 선정전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조선 중기 공포의 형상을 잘 남기고 있어 중요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