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93년 강릉시 청사 신축예정 용지에 대한 발굴조사로 드러난 강릉 객사터이다.
현재 강릉 임영관 삼문은 이 터의 남측에 1962년 국보로 지정 보존되어 있고, 서측에는 임진왜란 이후 경주에 있던 태조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다 봉안하였던 집경전(集慶殿)터가 있다.
조선 영조 때인 1750년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임영지(臨瀛誌)』에 의하면, 임영관은 936년(고려 태조 19)에 창건되었고, 그후 1627년(인조 5) 대청(大廳)이 화재를 당하여, 1633년 부사 유문화(柳文華)가 다시 건축하였다. 그후 수차례의 중수와 중창을 거쳐 1927년에 이르렀다.
『임영지』에 의하면, 강릉객사의 규모는 전대청(殿大廳) 9칸, 중대청 12칸, 동대청 13칸, 낭청방(廊廳房) 6칸, 서헌(西軒) 6칸, 월랑(月廊) 31칸, 삼문(三門) 6칸 등 모두 83칸이었다고 한다.
1993년도의 발굴조사에서 고려 초기부터 중기 이후, 조선시대의 연화문 암 · 숫막새들과 조선시대 와편들, 11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고급 청자편들, 16 · 17세기의 조선 백자 및 분청자기편들이 양호한 상태로 나왔다.
이들 출토품 및 유구, 『임영지』의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임영관은 고려 초기부터 1927년 1차, 1929년 2차의 강릉공립보통학교 설립에 따라 일제에 의하여 철거될 때까지 이 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에는 본래 공민왕이 1366년(무오년)에 낙산사 관음에 후사를 빌기 위하여 왔다가 길이 막혀 열흘동안 강릉에 머물렀을 때 쓴 ‘임영관(臨瀛館)’ 편액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객사문에 걸려 있는 편액은 1970년대에 다시 모사 제작한 것이다.
임영관지는 1993년 이곳에 있던 경찰서의 철거로 빈터로 남아 있다가 1993년 5월 10일 강릉시 청사 신축기공식 후 관상수를 옮겨심기 위하여 캐내던 중 임영관의 건물유구가 노출됨으로써 곧 발굴조사에 착수하여 사적으로 지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