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귀신사는 신라 때인 678년(문무왕 16) 의상대사가 세운 사찰이다. 귀신사는 고려 말에 왜구 300여 명이 이곳에 주둔했을 만큼 규모가 커서 주변 일대에 전각과 암자가 즐비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승병을 양성한 곳으로 전해진다. 현재 경내에는 대적광전, 명부전, 요사채가 남아있고 최근에 영산전을 신축했다. 이 중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은 17세기경 조선시대에 다시 건립되었다.
대적광전은 판석으로 면석을 이루고 그 위에 갑석을 놓은 고식 기단 위에 다시 장대석으로 외벌대를 돌렸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했고 기둥은 민흘림의 원기둥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평면의 구성이 독특하다. 규모로 볼 때 정면 3칸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5칸으로 계획하여 주간에는 겨우 문 두 짝만을 달 수 있는 크기이다. 어칸에서 협칸, 퇴칸으로 갈수록 1자 남짓씩 점차 주간이 줄어들며 기둥과 창방으로 구획되는 면들이 세로가 긴 직사각형을 이루어 건물 전체가 수직적 형상을 갖는다. 더욱이 측면의 풍판이 측벽에 붙을 정도로 우주에서 도리의 뺄목이 충분히 뻗지 못해 건물이 더욱 높게 느껴진다.
측면의 주간은 어칸을 길게 하고 전후 퇴칸의 길이를 짧게하는 보통의 평면구성과는 달리 오히려 퇴칸을 어칸보다 3자 이상 길게 하였다. 내부의 기둥열도 측면 평주열과 관계없이 앞뒤에 4개씩, 8개의 고주를 두 줄로 배치하여 마치 내진과 외진이 구별되는 중층 건물과 같이 평면을 구성했다.
『귀신사중수기』에는 법당이 2층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중수하면서 중층에서 단층으로 건물이 개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붕도 측면 평주와 내진주의 배열로 볼 때 팔작지붕에서 맞배지붕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전면에 모두 빗살문을 달았는데 어칸을 제외하면 협칸과 퇴칸은 문 밑에 머름대를 설치하여 창으로 계획하였다. 측면은 양측 모두 전퇴칸에 외짝문을 시설하였고 배면은 어칸에만 두 짝 빗살문을 달았다.
공포는 다포 구조이다. 맞배집이기 때문에 전 · 후면에만 공포를 배치하였다. 전면은 주간마다 1조씩의 간포를 배치했으나 배면에서는 퇴칸의 간포를 생략하였다. 내외 2출목 구조로 공포를 짜서 처마를 받치고 있는데 전면은 겹처마이고 후면은 홑처마이다. 공포는 전후면의 세부적 수법이 차이가 있다. 전면은 초제공과 이제공의 살미 끝이 서로 이어지듯 뾰족한 앙서형의 모습이며, 살미 위의 연봉 조각은 조선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반면에 배면은 살미 끝을 둥글게 운공형으로 초새김하였고, 특히 주상포의 초제공 살미 모습은 전면보다 후면이 고식의 수법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창된 건물을 중수하면서 뒤쪽에 옛 부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1873년(고종 10)에 춘봉스님이 중수하였다. 현재 법당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의 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모두 흙으로 빚어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