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경주 기림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인도의 스님 광유(光有)가 세워 임정사(林井寺)라 하였고, 그 뒤 원효대사가 새롭게 고쳐 지어 기림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놓은 법당을 가리킨다
기림사는 창건 이후 8차례에 걸쳐 중수 또는 중건되는 과정을 겪었다. 대적광전은 1997년 해체공사 때 4종의 종도리 묵서가 발견되었는데, 이 묵서에 의하면 1629년에 5차 중수에 해당하는 개중건상량(改重建上樑)이 있었고, 1755년에 대웅전 개조중수(改造重修)가, 1785년에 6차 중창이 있었으며 이때에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1988년 지정)이 봉안되면서 존상에 맞게 대웅전이 대적광전으로 개칭된 듯하다.
기림사의 사역은 크게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한 영역, 삼천불전 영역, 진입 영역 등 3개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약사전, 응진전, 진남루, 약사전과 대향하여 목탑지가 17세기 이후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그 외 명부전을 제외한 건물들은 모두 근래에 건립된 것이다.
대적광전은 배면 일부만 제외하고는 모두 장방형 막돌 외벌대 쌓기한 기단 위에 자연석을 적당히 방형으로 다듬은 초석과 주좌와 고맥이좌가 다듬어져 있는 초석을 혼용하여 약한 흘림을 한 원기둥을 세운 다포식 구조의 건물이다. 어칸과 협칸의 공간포는 2구(具)씩이고 측칸의 공간포는 l구이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공포의 짜임은 외 3출목 내 4출목으로 주두와 소로의 굽면은 사면이고 굽받침은 없다. 살미첨차의 끝은 비교적 실한 앙서로 되어 있으나, 내부에서는 각 제공들 간에 아무런 구별 없이 하나의 판형(板形)으로 서로 붙어 있고 또 연봉을 초각함으로서 조선 후기의 공포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정면 각각의 칸에는 소슬빗살꽃살창을 달았다. 어칸과 협칸은 4짝씩이고 측칸은 3짝씩인데, 어칸과 협칸의 모양은 서로 같지만 측칸의 모양과는 다르다. 좌우 측면의 전면쪽 측칸에 두짝의 여닫이 꽃살창호를 달았다. 후면의 어칸과 두 측칸에는 두짝 판문을 달았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은 상중도리와 하중도리 사이는 빗천장이고 전후 상중도리에는 우물천장을 두어 종보 위를 가리고 있다. 불벽을 내진 후면 고주 사이에 만들고 불벽 앞에는 불단을 형성하였다.
부연을 달아 겹처마를 구성하고 맞배지붕 양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기와는 암키와, 수키와, 내림새, 막새, 망와가 사용되었으며 용두나 잡상 등은 사용되지 않았다. 기와는 규격과 와당(瓦當) 문양이 여러 가지가 섞여 있어 여러 번의 중수(重修)를 거친 자취를 남기고 있다.
기림사 대적광전은 공포에 조각을 많이 넣어 17세기 건축 흐름을 알 수 있고, 특히 수리를 할 때 옛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아 중요한 건축사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