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은 삼국시대 화엄종의 개조이자 화엄십찰의 건립자인 승려이다. 625년(진평왕 47)에 태어나 702년(성덕왕 1)에 사망했다. 19세 때 경주 황복사로 출가했다. 661년(문무왕 1) 당에 유학하여 중국 화엄종의 제2조로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지엄에게서 8년간 화엄을 공부했다. 신라로 돌아온 해에 낙산사의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은 그의 관음신앙을 알게 해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부석사를 비롯한 화엄십찰을 전국에 세웠고 화엄경을 강론하며 3000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성은 김씨. 법명은 의상(義湘).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다.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이자 화엄십찰의 건립자이다.
19세 때 경주 황복사(皇福寺)로 출가하였다. 중국으로 가기 위하여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으나,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정탐자로 오인 받고 돌아왔다. 10년 뒤인 661년(문무왕 1)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중국화엄종의 제2조로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지엄으로부터 8년 동안 화엄을 공부하였는데, 그의 나이 38세로부터 44세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때,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開祖) 도선율사(道宣律師)와 교유하였으며, 중국화엄종의 제3조 현수(賢首)와의 교유는 귀국한 뒤까지 이어졌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의 귀국 동기는 당나라 고종(高宗)의 신라 침략소식을 본국에 알리는 데 있었다고 하며, 『송고승전』에는 화엄대교(華嚴大敎)를 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신라로 돌아온 해에 낙산사(洛山寺)의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은 그의 관음신앙을 알게 해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그 뒤 676년(문무왕 16)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까지 화엄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전국을 편력하였다. 그가 건립한 사찰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중악팔공산 미리사(美里寺), 남악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강주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 가야현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삭주화산사(華山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전주모악산 국신사(國神寺) 등 화엄십찰(華嚴十刹)이다. 이밖에도 불영사(佛影寺), 삼막사(三幕寺), 초암사(草庵寺), 홍련암(紅蓮庵)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그에게는 3,000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10명이 아성(亞聖)으로 불렸으며, 범체(梵體)나 도신(道身) 등도 뛰어난 제자들이다.
그는 황복사에서 『화엄일승법계도』를 가르쳤고, 부석사에서 40일간의 법회를 열고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문답하였으며,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화엄경』을 90일 간 강의하였다. 지통의 『추동기(錐洞記)』, 도신의 『도신장(道身章)』 등은 그의 강의를 기록한 문헌들이고, 표훈의 『오관석(五觀釋)』과 진정의 『삼문석(三門釋)』은 그로부터 『화엄일승법계도』를 배우고 지은 것이다.
그는 강의와 수행에 전력했으며 의정(義淨)의 세예법(洗穢法)을 실행하여 수건을 쓰지 않았고 의복·병(甁)·발우, 세 가지만 지녔다. 문무왕이 장전(莊田)과 노복(奴僕)을 베풀자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문무왕이 성곽을 쌓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왕의 정교(政敎)를 밝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글을 올려 역사(役事)를 중지시켰다.
저술로는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 1권,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1권, 『화엄일승법계도』 1권, 『백화도량발원문』 1권 및 최근 발견된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