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언절구 총 20구의 게송(偈頌)이다. 고려시대 금자사경(金字寫經)에 필사된 채 전해졌으므로 그 제작 내력에 대해서 알 수 없다. 그러나 의상이 676년(문무왕 16) 태백산에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고 전교의 문을 더욱 넓히던 때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이 관음성굴(觀音聖窟)에서의 재계(齋戒) 예배할 때의 원문이라고 한다면, 이 「일승발원문」은 화엄의 사상과 도리를 천명하고, 또 이를 실천하려는 종교적 염원이 전체적 분위기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의 3,000명의 제자, 그 가운데에서도 뛰어난 10명의 제자(義湘門下十德) 등이 지녀야 할 정신적 지침이 있어야 한다고 볼 때, 이 「일승발원문」은 바로 그의 종교적 염원과 함께 화엄종파의 신행적 내실을 추구하기에 족하다. 즉, 그의 종교적 발원이 화엄사상에 기인하는 것이고, 그 화엄사상의 중심이 또한 일승의 체계 속에서 완성됨을 이해할 수 있다. 「법성게」가 불교의 진리관에 입각한 화엄사상의 천명이라면, 이 「일승발원문」은 그의 종교관을 토대로 한 윤리관과 자비관의 확인이다.
그 기본적 구성은 무량한 시간과 공간에 걸쳐서 언제 어디에서나 오직 삼종세간(三種世間)과 중생의 근원적 업이 되고 있는 삼업(三業)에 대한 종교적 발원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와 함께 예경의 대상으로서의 삼보(三寶), 그리고 구제의 대상으로서의 육도(六道) 중생을 나타내어 종교적 발원과 수행을 통한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의 왕생성불을 기본으로 한다.
이 발원문에 수록되어 있는 경문은 의상 재세시에 의상 자신이 읽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신역(新譯) 『화엄경』인 80권본이므로 그 뒤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더욱 애송되면서 사경에까지 실리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이 사경은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紺紙金泥大方廣佛華嚴經)』 권1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의 말미에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금자경의 제작은 1350년(충정왕 2)으로 고려시대에 성행한 일반 금은니(金銀泥) 사경과 그 형식을 같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