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궁(行宮)이라고도 한다. 역대왕조가 대개 이궁을 세웠으나, 특히 고려는 지리도참설의 영향을 받아 많은 이궁을 세웠다.
고려에서 서경을 풍수지리상뿐만 아니라 북방경영의 거점으로도 매우 중요시해 이미 태조 때 대도호부를 설치하고 서경으로 승격하여, 서경에는 제2의 수도로서 각종 시설이 지어졌다.
서경에 설치한 이궁으로 어떠한 것이 있었는지 자세히 모르지만, 기록에 의하면 1081년(문종 35)에 문종이 서경의 궁궐이 오래되어 허물어진 것이 많다며 수리를 명했고, 또 서경 동북쪽 10여리 되는 지점에 좌우궁궐(左右宮闕)을 짓게 하였다.
1116년(예종 11)에는 예종이 서경에 새로 지은 용언궁(龍堰宮, 일명 龍德宮)에 행차할 때 서경의 장락궁(長樂宮) · 구제궁(九梯宮)에 들렀다는 것으로 보면, 서경에 일찍부터 궁궐(이궁)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장락궁 · 구제궁 · 좌궁궐 · 우궁궐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리도참설에 의해 묘청(妙淸) 등의 청으로 1129년(인종 7)에 임원역(林原驛) 터에 세운 대화궁(大花宮)이 있었다. 그리고 남경(南京)에도 이궁이 설치되었다. 즉 1067년에 양주(楊州)에 남경을 설치하고 그 이듬해 궁궐을 창건하였다.
이렇게 남경에 궁궐을 설치한 것은 국가의 기업을 연장하려는 지리도참설에 의한 것이지만, 문종 때의 남경 경영은 얼마 뒤 중단된 것 같다.
숙종 때 술사(術士) 김위제(金謂磾)의 건의에 따라 다시 남경을 설치하고, 1114년에 남경궁궐의 낙성을 보게 되었으며, 그 위치는 지금의 경복궁 신무문(神武門) 밖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의종은 이궁과 누정(樓亭)을 많이 세우고 유흥을 일삼았는데, 그 중에 영은문(迎恩門) 북쪽의 인가를 빼앗아 증축, 수리해 관북별궁(館北別宮)을 삼았다.
또 1117년에는 백주(白州)에 중흥궐(重興闕)을 창건했으며, 누정으로 태평정(太平亭) · 중미정(衆美亭) · 만춘정(萬春亭) 등을 호화롭기 그지없게 새로 지었다.
또 명종 때에는 국가의 기업을 연장하려고 지리도참설에 의해 이궁으로 삼소궁(三蘇宮)을 경영하였다. 즉 1174년(명종 4)에 삼소(三蘇)에 연기궁궐조성관(延基宮闕造成官)을 설치하고 삼소궁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삼소라 함은 좌소(左蘇) · 우소(右蘇) · 북소(北蘇)를 말하며, 좌소는 백악산(白岳山), 우소는 백마산(白馬山), 북소는 기달산(箕達山)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