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궁은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에 있는 고려 제17대 인종 당시 서경 임원역에 건설된 별궁이다. 음양설과 풍수지리설에서는 기운이 좋은 땅을 대화세, 대명지라고 한다. 궁의 이름도 대화궁, 대화궐이라 하였는데, 임원역에 세워져서 임원궁이란 별칭도 있었다. 대궐 안에는 정전인 건룡전과 팔성당이 있었다. 인종이 한때 이곳에 몸소 실행하여 잔치를 열고 서경으로의 천도를 준비하기도 하였으나, 묘청의 난이 일어나 서경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1126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궁궐이 거의 불타고 왕권은 실추되어 기강이 크게 무너졌다. 게다가 밖으로는 금나라의 세력이 왕성해지고 상국(上國)으로 대해 왔던 북송(北宋)이 무너져 대외정책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와 같은 내우외환을 타개할 묘책으로, 서경의 승려 묘청(妙淸)은 지덕쇠왕설(地德衰旺說)을 들고 나왔다. 이는 지덕이 쇠한 상경(上京)을 버리고 지덕이 왕성한 서경(西京)으로 천도하자는 주장이었다.
묘청은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이 땅의 생긴 모양이나 형세로 보아 음양가의 소위 대화세(大花勢)에 해당하는 곳이므로 이곳에 궁궐을 세우면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36국이 모두 신하가 되어 천하를 병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칭제건원(稱帝建元)도 주창하였다. 이러한 지덕쇠왕설에 입각한 천도론은 인종에게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1128년(인종 6) 왕은 친히 서경으로 가서 재추(宰樞)들에게 묘청 · 백수한(白壽翰)과 더불어 터를 살피게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궁궐 신축을 명하였다.
궁궐 공사가 혹한기 3개월 동안 진행된 탓에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그렇게 수축(修築)된 궁궐의 이름은 대화궁(大花宮)이었다. 이는 보통의 명당보다 훌륭하고 뛰어난 대명당(大明堂) · 대길지(大吉地)의 뜻을 지닌 대화세에 세워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위치가 『조선 고적 도보(朝鮮古蹟圖譜)』에는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남궁리의 한 부분인 옛 지명 ‘신궁동(新宮洞)’ 내의 폐지(廢址)로 나타나 있다.
대궐 안에는 정전(正殿)인 건룡전(乾龍殿)과 팔성당(八聖堂)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특히 이 팔성당은 종래 다른 이궁(離宮)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1131년(인종 9)에 세워졌으며, 백두악 태백선인실덕문수사리보살(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 등 팔신의 상(像)을 그려 모셨다. 이 팔성당의 설치 목적은 국가의 복리를 더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설치 이후에 하등의 상서로운 일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왕이 서쪽으로 행차할 때마다 각종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기상이변들도 속출하였다. 이 때문에 민심이 날로 흉흉해졌고, 묘청을 배척해야 한다는 요구들이 거세어졌다. 국자사업(國子司業) 임완(林完)은 민심을 현혹시키는 묘청을 속히 참수해 하늘과 민심을 달래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권신 김부식(金富軾) 등도 간관(諫官)들과 함께 왕의 서경 행차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서경행의 중지를 간하였다.
이로써 풍수도참(風水圖讖)의 지덕쇠왕설에 의거해 서경천도운동(西京遷都運動)의 일환으로 세워진 대화궁은 그 의욕적인 수축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쓰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1135년(인종 13) 서경 세력을 중심으로 한 묘청의 난이 일어나면서 반란의 근거지로 변질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