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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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전기 제17대 인종 연간에 서경의 임원궁 안에 설치한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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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팔성당은 고려 전기 제17대 인종 연간에 서경의 임원궁 안에 설치한 사당이다.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 땅이 음양가에서 말하는 대화세이므로 그곳에 궁궐을 지어 임금이 거둥하면 천하를 통일할 것이라고 하였다. 1129년(인종 7) 정월에 새 궁궐을 낙성시킨 묘청과 그 도당은 1130년 8월에 다시 궁중에 팔성당을 설치하도록 인종을 설득하였다. 팔성당은 팔성, 또는 팔선으로 합칭되는 여덟 곳의 산지를 상징한 회상을 봉안한 사당이다. 팔성의 명칭을 살펴보면, 산악신앙과 직결되어 있는 우리 고유의 신선 사상과 불교 사상이 합류되어 있음을 곧 알 수 있다.

목차
정의
고려전기 제17대 인종 연간에 서경의 임원궁 안에 설치한 사당.
내용

거기에는 팔성(八聖), 또는 팔선(八仙)으로 합칭되는 여덟 곳의 산지를 상징한 신기의 회상(繪像)인 호국백두악태백선인실덕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舍利菩薩), 용위악육통존자실덕석가불(龍圍嶽六通尊者實德釋迦佛), 월성악천선실덕대변천신(月城嶽天仙實德大辨天神), 구려평양선인실덕연등불(駒麗平壤仙人實德燃燈佛), 구려목멱선인실덕비파시불(駒麗木覓仙人實德毗婆尸佛), 송악진주거사실덕금강색보살(松嶽震主居士實德金剛索菩薩), 증성악신인실덕늑차천왕(甑城嶽神人實德勒叉天王), 두악천녀실덕부동우바이(頭嶽天女實德不動優婆夷) 등을 봉안하였다.

팔성당의 설치는 본래 평양 출신의 승려인 묘청(妙淸)이 서경천도운동의 일환으로 인종을 설득하여 이루어진 일이다. 이에 앞서 묘청은 인종에게 상언(上言)하여 서경 임원역의 땅이 음양가에서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최고의 명당자리)이므로 그곳에 궁궐을 지어 임금이 거둥하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당시 고려를 위협하던 금나라는 폐백을 가지고 제발로 항복해 올 것이며, 그 밖의 36개 국가들도 다 신첩(臣妾:복속국가)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논란이 되어 오던 풍수도참에 따른 지덕설에 근거를 둔 낭설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인종은 묘청의 말을 받아들여 몸소 서경에 가서 수행한 재추(宰樞)에게 명하여 묘청 및 그의 앞잡이였던 백수한(白壽翰)과 함께 임원역의 땅을 살피게 한 뒤, 역시 묘청의 도당 중 하나였던 김안(金安)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하였다.

김안은 백성들의 원성을 무릅쓰고 궁궐 영조(營造)를 무리하게 독촉하여 1129년(인종 7) 정월에 새 궁궐을 낙성시켰다. 그 해 2월에 인종이 서경에 가서 새 궁궐에 들어갔으며, 그때 묘청과 그 도당들은 인종에게 칭제건원(稱帝建元)하기를 백방으로 권하였으나 인종은 끝내 그 권유에 따르지 않았다.

이렇듯 묘청이 도모한 서경천도운동은 임원궁의 영조 정도로 주춤하고 말았으나 묘청과 그 도당은 그 일을 단념하지 않고 1130년 8월에 다시 임원궁의 성곽을 구축하고 궁중에 팔성당을 설치하도록 인종을 설득하였다. 인종은 다시 이중부(李仲孚)를 보내 그 일을 집행하게 하였다. 이어 김안 등이 임원궁궐 안의 팔성에게 제사지낼 것을 주청하였다.

서경 출신의 문신 정지상(鄭知常)도 묘청의 설을 믿고, 상경인 송도는 기업(基業)이 이미 쇠하고 궁궐도 난리에 다 타버리고 없어졌는데, 서경에는 왕기(王氣)가 있으니 그곳으로 임금이 옮겨가서 상경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정지상은 서경천도운동을 성공시키면 자신과 후손의 부귀영화를 가져오게 되리라는 생각을 품고 그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또한 정지상은 묘청 · 백수한과 함께 한때 묘청의 도당 사이에서 세 성인의 하나로 높여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처지에 있던 정지상이었으므로 임원궁의 팔성을 제사하는 데 쓰인 제문을 짓기까지 하였다. 그는 제문에서 평양에서 대화세를 잡아 궁궐을 짓고 팔선을 안치하여 백두산을 첫째로 받들어 그 실제의 은덕을 받게 되는 점을 힘주어 말하였다.

팔성의 명칭을 살펴보면, 산악신앙과 직결되어 있는 우리 고유의 신선사상과 불교사상이 합류되어 있음을 곧 알 수 있다.

우리 땅의 진산(鎭山)인 백두산을 비롯하여 거기서 약간 떨어져 있는 용위악(평안북도 龍川에 있는 龍骨山), 월성악(고려 인종 때 송도에 속했던 兎山), 구려평양(고구려의 도읍지였던 평양의 진산이고 모란봉이 있는 錦繡山)과, 한때 고구려 고국원왕이 머물렀던 평양 땅에 있는 목멱산, 송도의 송악, 증성악(평양에 인접해 있는 甑山의 國靈山), 두악(경기도 강화의 摩利山) 등 8개 소의 산악이 내세워져 있다.

이 가운데 평양은 산이름은 아니나 그 진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또 평양을 내세워 상경의 적지로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도 개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평양 이북의 산악이 5개 소이고 송도의 그것은 2개 소에 불과하며, 단군이 제천한 마리산이 하나 들어 있다. 마치 평양과 송도의 지기상(地氣上)의 우열을 드러내려는 저의가 깔려 있는 듯하다.

한편, 우리나라의 선파(仙派)측에서는 묘청이 불승이었기 때문에 팔성의 명칭에 보살이나 부처의 이름을 덧붙였을 뿐이지 산악을 중심으로 한 팔성은 이 땅 고유의 신명(神明)임을 주장하였다. 고려 때의 선파 인물인 이명(李茗)은 『진역유기(震域遺紀)』에서 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① 호국백두악태백선인:큰 지혜와 큰 덕이 있어 주신(主神:桓因)을 도와 큰 세계를 만들었으니 곧 환웅천왕을 말한 것이다. ② 용위악육통존자:온갖 이치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어 인간의 화복을 맡아본다. ③ 월성악천선:비바람을 맡아보는 신이다. ④ 구려평양선인:광명을 맡아보는 신이다. ⑤ 구려목멱선인:인간의 수명을 맡아보는 신이다.

⑥ 송악진주:큰 용기와 힘이 있어 신령한 군사를 맡아보고 늘 국토를 진수하여 외적을 몰아내니, 곧 옛 치우씨(蚩尤氏)의 신이다. ⑦ 증성악신인:사시와 곡식, 채소와 초목에 관한 일을 맡아보니, 곧 옛 고시씨(高矢氏)의 신이다. ⑧ 두악천녀:지상의 선악을 맡아보니 곧 신시씨(神市氏)의 왕후이고, 환검신인(桓儉神人)의 어머니이다.

이명의 설에 의하면 이들은 다 일대주신(一大主神)인 환인의 지시하에서 천하의 모든 일을 맡아 다스리는 신들이다.

선파측에서는 묘청이 인종을 미혹시켜 총애를 받아 교만해진 뒤, 반역을 저지르게 된 것은 배격하지 않을 수 없지만, 당시 묘청이 국력이 부진함을 한스럽게 여기고 외국의 모욕이 계속되는 것을 분하게 여겨 흩어진 전설 속에서 고려의 신명을 취해다가 당시의 인심을 불러일으키려 했으므로 그의 행실은 어그러졌지만 그의 뜻에는 그래도 취할 만한 점이 있다고까지 하였다.

서경의 팔성당은 묘청이 서경천도운동을 추진하는 중에 드러낸 한 가지 조작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통하여 고려시대 지기쇠왕설의 추이를 알아볼 수 있고, 또 그것이 우리 땅의 신선사상과 불교사상이 합류된 사례의 하나라는 점에서 우리 사상사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규원사화(揆園史話)』
『한국도교사』(이능화, 동국대학교 출판부, 1959)
『고려시대사』(김상기, 동국문화사, 1961)
『한국도교사상연구』(차주환,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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