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의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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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
의례·행사
도교에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기 위하여 도사(道士)가 중심이 되어 행하는 종교의례. 도교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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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도교에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기 위하여 도사(道士)가 중심이 되어 행하는 종교의례. 도교의례.
내용

중국에서 도교의 교단이 생기고 도사들이 배출되어, 도관(道觀)에서 양재기복(壤災祈福)을 위한 각종의 의식이 행해짐에 따라 도교의 과의는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고구려 말엽에 정식으로 도교가 도입되었는데, 그 당시의 도교는 통치자를 위한 양재기복의 과의도교였으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과의도교는 왕실의 비호 아래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

『도장 道藏』에는 동진(洞眞)·동현(洞玄)·동신(洞神)의 3부에 각각 위의류(威儀類)라는 제목으로 각종 과의가 수록되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행해진 도교의식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전하여지지 않으나, 대략 『도장』에 나와 있는 중국 도교의 의식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초(齋醮)를 거행할 때의 제문인 청사(靑詞) 또는 초제문(醮祭文)은 고려시대 이래의 것이 상당수 보존되어 있고, 제례의식에 관한 기록도 야사나 만록(漫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에서 도관이 최초로 건립된 것은 한나라 무제 때이었지만, 그 뒤 단절되었다가 후한 때 태평도(太平道)·오두미도(五斗米道)·천사도(天師道)·모산도(茅山道) 등이 생겨남에 따라, 도교교단이 형성되어 종교적 의식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치병을 주로 하는 민간도술의 테두리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뒤 갈홍(葛洪)·육수정(陸修靜)·고환(顧歡)·도홍경(陶弘景) 등에 의하여 도교의 교리가 발전되었으며, 북위(北魏)의 구겸지(寇謙之)에 의하여 국가적인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구겸지는 방중술(房中術)·조미전세(租米錢稅)와 같은 천사도의 불합리한 점을 배제하고, 조직과 체제를 개혁하여 실질적인 종교 교단으로서의 신천사도(新天師道)를 확립하였다. 이 때 종교의식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국가와 그 통치자를 위하여 양재기복하는 과의가 제도적으로 마련되었다.

당나라 때 왕실의 성이 이씨(李氏)여서 노자(老子)이이(李耳)를 조상으로 받들고, 도교를 숭상하여 도사 중심의 양재기복을 주목적으로 하는 과의도교가 극성하게 되었다. 고구려 말기에 도입된 도교는 바로 이러한 당나라의 과의도교였다.

624년(영류왕 7) 당나라 고조(高祖)는 도사와 함께 천존상(天尊像)과 도법(道法)을 고구려에 보내어 도사로 하여금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고, 강론을 듣고 난 영류왕은 그 이듬해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노(老)·불(佛)을 배워오게 하였는데, 당나라 고조는 결국 과의도교를 전래시켰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규모가 극히 작아 국가종교로 받아들일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 뒤 634년(보장왕 2)연개소문(淵蓋蘇文)의 건의에 따라 도교를 국가종교의 하나로 정립시켰고, 오히려 유·불보다 우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당나라 태종(太宗)이 서달(敍達) 등 도사 8인을 보내자 보장왕은 기뼈하며 불사(佛寺)를 도관(道觀)으로 하고, 도사를 유사(儒士)보다 높였으며, 국내의 이름있는 산천을 진호(鎭護)하는 재초를 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도사를 시켜 도교적 의식에 따라 국가를 위한 재초를 거행하였음을 알게 하는 것으로 과의도교의 국가적인 수용과정이었다. 그 구체적 내용에 관해서는 문헌자료가 전혀 없어 알 수 없으나, 당시 중국의 과의도교 절차를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때에는 과의도교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용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당나라에 유학갔던 최치원(崔致遠)이 중국의 도관에서 행해진 재초를 위하여 청사를 여러 편 지어주었고, 그의 문집에 그 글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고려시대 과의도교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여져 각종의 재초가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고려사』에는 1018년(현종 9) 7월 을해일 구정(毬庭)에서 대초(大醮)를 거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문헌에 나타나는 최초의 과의도교적 행사의 기록이다. 현종은 1024년에도 한 차례 대초를 행하였고, 덕종과 정종 때는 여러 차례의 기우초(祈雨醮)가 있었다. 문종은 1046년 6월 기미일 본명초(本命醮:본명이란 출생의 육십갑자간지를 말함)를 거행하였고, 그 뒤 재위 37년 동안 본명초를 연례행사로 행하면서 기우초와 태일구궁(太一九宮)의 초제도 지냈다.

이렇듯 고려의 역대왕은 도교의 과의에 따른 각종 초제를 지냈는데, 그 가운데서도 예종과 의종이 가장 빈번하게 거행하였다. 예종은 특히 도교에 심취하여 기록에 나타나는 것만 해도 27회의 초제를 행하였고, 복원궁(福源宮)을 짓고 도사들에게 과의를 집행하도록 하였으며, 때때로 자신이 친초(親醮)하기도 하였다.

또한, 1107년 윤10월 경자일에는 옥촉정(玉燭亭)에 원시천존상(元始天尊像)을 안치하고 월례적인 초제인 월초(月醮)를 지내게 하였다. 의종은 기록상으로는 26회에 그치지만 실제의 초제거행은 매우 빈번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그 대상도 성수(星宿) 쪽으로 확대되어 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국가에서 거행하는 도교의 재초 규모가 축소되기는 하였으나 폐지되지는 않았다. 1392년(태조 1) 도교초제의 거행장소로 송도의 소격전(昭格殿) 한 곳만을 남겼고, 한양 천도 직후인 1395년 한양에도 소격전을 지었다.

이 밖에도 대청관(大淸觀)과 태일(太一)을 제사하는 영흥궁(永興宮)의 도관이 있어 초제를 행하였다. 1465년(세조 11) 소격서(昭格署)로 개칭하여 일정한 직제를 마련하고, 종5품의 벼슬이 관장하도록 하였다. 중종 때 유신(儒臣)들의 간청으로 한때 소격서가 혁파되었으나 곧 부활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다시 폐지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도교는 끝내 종교적 교단으로 성립하지 못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고구려 때부터 과의도교가 도입되기는 하였으나 당나라에서 보낸 도사들에 의하여 재초가 거행되었고, 고구려인들 가운데서 도사가 나와 도교행사를 담당하지는 못하였다.

고려시대에도 도관인 복원궁이 건립되어 10여 명의 도사들이 재초를 집행하였으나, 밤에는 계율을 지키지 않고 사실(私室)로 들어가 속인과 다름없었고, 복장도 일반사람이 입는 옷보다 소매가 약간 넓은 것을 착용하는 등 마치 관원과도 같이 도관에서 맡은 일만 처리할 뿐 도교의 교세를 보존, 확장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성리학이 국가의 이념으로 정립됨에 따라 도교는 왕실의 양재기복에만 국한되어 잔존하다가, 조선 중기 이후 왕실의 권한이 쇠퇴함에 따라 마찬가지의 쇠퇴과정을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증보문헌비고』
『동문선』
『경국대전』
『한국도교사』(이능화 저, 이종은 역주, 보성문화사, 1986)
『한국도교사상연구』(차주환, 동화출판공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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