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호(道號)는 진인(眞人), 별칭은 상락군(上洛君) 또는 적상(赤裳)이다.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걸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며, 단학설화(丹學說話)에 나오는 인물이다. 야사와 만록(漫錄)에는 성만 권이라고 전할 뿐, 권진인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진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다만 득도자라는 뜻에 불과하다.
홍만종(洪萬宗)이 쓴 『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권진인의 행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고려 때인 1069년(문종 23)에 상락 대성(大姓)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4세 때 나병에 걸려 그 부모가 숲속에 버렸는데, 밤중에 큰 범이 물고 가 태백산의 한 석실에 두었다. 그 뒤, 혼자 잎이 넓고 뿌리가 큰 약초를 1백일 동안 캐먹고 마침내 악창이 깨끗해져 병이 나았다. 더구나 비상한 체력도 얻게 되었다.
그 뒤, 한 스님의 지시로 태백산 서봉(西峯)에 있는 암자를 찾아가서, 병든 노승으로부터 신라의 의상(義湘)이 전수한 도법을 적은 도서를 전수받았다. 그 뒤 11년의 독거수련(獨居修練) 끝에 드디어 신태(神胎: 수련자가 득도하여 이룬 金丹)를 이룩하였다.
이 때 전수받은 도서는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금벽용호경(金碧龍虎經)』·『참동계(參同契)』·『황정내외경(黃庭內外經)』·『최공입약경(崔公入藥經)』을 비롯하여 『태식(胎息)』·『심인(心印)』·『통고(洞古)』·『정관(定觀)』·『대통(大通)』·『청정(淸淨)』 등 모두가 수련도교에 관련된 경전들이었다.
권진인이 신태를 이룩한 뒤의 행적은 자세하지 않으며, 다만 거의 5백 년이 지난 1555년(명종 10)에 당시 사마시에 합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궁두(南宮斗)에게 내단수련법(內丹修練法)을 가르치고는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이는 도를 전수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에 신태를 이룩한 뒤에도 신선이 되지 못하고, 50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기다리다가 남궁두를 만나 수련을 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궁두는 수련중 욕념이 가시지 않아 거의 신태를 다 이룩한 단계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 남궁두에게 전수한 도서는 『황정경(黃庭經)』과 『참동계(參同契)』가 주요한 것이었고, 『도인경(度人經)』과 『옥추경(玉樞經)』도 들어 있었다. 남궁두는 수련 도중 권진인의 신태를 구경할 수 있었는데, 제하단전(臍下丹田)을 풀자 1백 줄기의 금빛이 밖으로 튀어나왔다고 한다.
한편,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나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의하면, 의상(義湘)으로부터 도요(道要)를 전수받고 최치원(崔致遠)과도 교우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의 도맥에 따르면, 최승우(崔承佑)의 도법이 이청(李淸)을 거쳐 명법(明法)에게 전해지고, 명법으로부터 다시 상락군 권청(權淸)에게 전수되었다 하니, 권진인은 권청과 같은 사람으로 추측되며, 『해동이적(海東異蹟)』에 실린 권진인의 이적이 전혀 사실무근한 내용이 아님을 말해준다. 권진인은 다시 원나라 설현(偰賢)과 남궁두·조운흘(趙云仡)에게 도를 전수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모두 사실로 믿기는 어려우나, 우리 나라 수련도교 연구에 있어 사료적 가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