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한(白壽翰)의 가계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그리고 「윤언이묘지명(尹彦頤墓誌銘)」에서는 그의 이름을 ‘백수한(白壽翰)’이라 하였는데, 「최함묘지명(崔諴墓誌銘)」에서는 ‘백수한(白守翰)’이라 하였다. 아들로는 백청(白淸)이 확인된다.
1127년(인종 5) 백수한은 일관(日官)으로서 서경(西京)의 승려인 묘청(妙淸)과 함께 인종(仁宗)을 설득하여 상안전(常安殿)에서 정수리에 향수를 붓는 불교 의식인 관정도량(灌頂道場)을 베풀게 하였다.
1128년(인종 6)에는 서경의 분사(分司)에 속한 검교소감(檢校少監)이 되어 묘청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음양비술(陰陽祕術)로써 뭇 사람을 현혹시키고 서경천도(西京遷都)를 추진하였다. 서경 출신인 정지상(鄭知常)도 “개경은 이미 왕업이 쇠하며 궁궐이 모두 불타버리고 남은 것이 없지만, 서경은 왕기(王氣)가 있으므로 마땅히 임금이 이어(移御)하여 상경(上京)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왕의 근신(近臣) 홍이서(洪彝敍)와 이중부(李仲孚), 대신(大臣) 문공인(文公仁)과 임경청(林景淸) 등도 여기에 협력하였다. 그리하여 묘청과 함께 서경의 임원역(林原驛) 지역을 새로운 궁궐터로 제시하였으며, 마침내 서경에 행차한 인종으로 하여금 재추(宰樞)에게 그 지역을 둘러보고 새 궁궐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1129년(인종 7) 인종이 다시 서경에 행차하여 새 궁궐의 건룡전(乾龍殿)에서 신하들의 하례(賀禮)를 받자, 백수한은 묘청·정지상 등과 함께 이르기를 “주상께서 건룡전에 앉으시니, 공중에서 풍악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것이 어찌 새 궁궐로 행차하신 것에 따른 상서로움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이를 축하하는 표문을 짓고 재추들의 서명까지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표문은 재추들의 반발로 결국 올리지 못하였다.
1132년(인종 10)에는 인종이 묘청을 수가복전(隨駕福田)으로 삼고 백수한을 내시(內侍)로 들이면서 서경으로 행차하였는데, 금암역(金巖驛: 현, 황해도 평산군에 소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일어난 폭풍우로 인해 왕의 행차마저 길을 잃고 진흙탕에 빠지는 사고까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서경천도의 당위성이 의심받자, 백수한은 묘청·정지상 등과 함께 은밀히 큰 떡을 만들어서 그 가운데에 기름을 넣고 대동강에 가라앉힘으로써 오색 빛이 감도는 기름이 수면에 뜨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신룡(神龍)이 침을 토하는 것이라 하면서 대동강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음을 선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인종이 평장사(平章事) 문공인(文公仁)과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준양(李俊陽) 등을 보내어 조사함으로써 결국 거짓이 들통났다. 이로 인해 백수한은 묘청과 함께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임원애(任元敱), 직문하(直門下) 이중(李仲), 시어사(侍御史) 문공유(文公裕)의 탄핵 등을 받았다.
묘청이 이런 처지에서 1135년(인종 13) 1월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당시 서경에 있던 백수한의 친구가 “서경에서 이미 반란을 일으켰으니 몸을 빼내어 이리로 오라.”라는 편지를 써서 아들 백청(白淸)을 통해 보내왔다. 백수한은 이 편지를 왕에게 아뢰었고, 인종은 그것을 다시 문공인에게 보여주었다. 이에, 문공인은 “이는 진위를 분별하기 어려우니 잠시 비밀에 붙여두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책임자였던 김부식(金富軾)이 “서경의 반역은 정지상·김안·백수한 등이 함께 모의한 것이다. 이 사람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서경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말한 뒤, 이들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그리하여 궁궐에 도착한 백수한은 결국 정지상·김안 등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또한 묘청의 난이 완전히 진압된 1136년(인종 14)에는 그의 처자도 모두 적몰(籍沒)되어 노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