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관(日官)으로 1127년(인종 5) 서경(西京)의 승려 묘청(妙淸)과 함께 왕을 설득해 상안전(常安殿)에서 관정도량(灌頂道場: 정수리에 향수를 붓는 불교의식)을 베풀게 했다.
1128년에 검교소감(檢校少監)으로 서경에 파견되자, 묘청을 스승으로 섬기고 그와 함께 음양비술(陰陽祕術)로써 뭇 사람을 미혹시키면서 서경천도운동을 폈다.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면 중흥공신(中興功臣)이 되어 일신의 부귀뿐만 아니라, 자손에게도 무한한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침내 왕을 움직여 서경에 행차하게 하고 재추(宰樞) 및 묘청과 함께 임원역지(林原驛地)에 새 궁궐터를 살펴서 정하였다. 이 새 궁궐은 이듬해 완성되어 이름을 대화궁(大花宮, 大華宮)이라 했다.
1132년 묘청과 함께 인종으로 하여금 서경에 행차하게 했는데, 금암역(金巖驛: 지금의 황해도 평산 지역)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폭풍우(暴風雨)가 일어 인종이 길을 잃고 진흙에 빠지게 되는 등 불상사가 일어났다.
또한, 백수한은 묘청 및 정지상(鄭知常) 등과 함께 은밀히 큰 떡을 만들어 그 가운데 기름을 넣고 대동강에 가라앉혀서 기름을 수면에 뜨게 하였다. 그래서 오색(五色)이 감도는 것처럼 하고는, 신룡(神龍)이 침을 토하는 것이라 하면서 대동강 유역에 서기(瑞氣)가 있음을 선전하였다. 결국, 인종이 평장사(平章事) 문공인(文公仁),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준양(李俊陽) 등을 보내어 조사하게 함으로써 거짓이 발각되었다.
1133년에 묘청과 함께 직문하(直門下) 이중(李仲), 시어사(侍御史) 문공유(文公裕) 등에게 탄핵을 받았으나 무사하였다. 그러나 1135년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개성(開城)에 있던 백수한은 같이 연루되어 원수(元帥) 김부식(金富軾)에 의해 궁문 밖에서 정지상·김안(金安) 등과 함께 피살되었다. 그리고 처자는 노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