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8년(인종 6)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정지상(鄭知常) 등이 서경천도운동을 벌일 때 이중부(李仲孚), 대신 문공인(文公仁)·임경청(林景淸) 등과 함께 “묘청은 성인이요 백수한은 그 다음이니, 국가의 일을 그들에게 묻고 행하며 그들의 건의를 모두 받아들여야 국가가 보전될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올려 동조, 호응하였다.
1133년에는 지주사(知奏事)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김우심(金于審) 등 25인의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1135년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왕명으로 이중부와 함께 조서(詔書)를 가지고 이들의 초유(招諭)를 위하여 파견되었다.
그러나 생양역(生陽驛)에 이르러 두려워 더 가지 못하고 역리를 시켜 조서를 전한 다음 돌아오고 말았다. 이 때문에 김부식(金富軾)에 의하여 평주(平州)에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