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주(洞州: 현, 황해도 서흥군)이며, 처음 이름은 직서(稷諝)이다. 태조(太祖)의 공신인 대광(大匡) 안락(安樂)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검교소부감(檢校少府監) 안인표(安仁表)이며, 조부는 소부감에 추봉된 안정화(安鼎和)이다. 아버지는 태자태부(大子大傅)에 추봉된 안신조(安申祚)이며, 어머니는 국자좨주(國子祭酒)·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지내고 사학 12공도(十二公徒) 가운데 하나인 남산도(南山徒)를 설립한 경주인(慶州人) 김상빈(金尙賓)의 딸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 김씨이다. 부인은 수사공(守司空)·좌복야(左僕射)·판공부사(判工部事)를 지낸 양평공(良平公) 유자유(柳子維)의 둘째 딸 유씨(柳氏)이다. 자녀는 유씨 소생으로 어려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수주판관(樹州判官)·예빈주부(禮賔主簿)에 오른 장남 안거중(安居中)과 음서로 관직에 나가 장사랑(將仕郎)·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에 오른 차남 안거정(安居正) 등 아들 2명 있고, 장사랑·양온령동정을 지낸 이문저(李文著)와 혼인한 딸 1명이 있다.
안직숭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중간에 남궁(南宮: 국자감)에 선발되었다. 1098년(숙종 3)에는 송(宋)에 사신으로 간 중서사인(中書舍人) 윤관(尹瓘)을 수행하고 돌아왔다. 1100년(숙종 5) 내시급사(內侍給使)에 들어간 뒤에는 숙종(肅宗)이 그의 재주와 기량을 높이 사서 ‘직서(稷諝)’를 대신해서 ‘직숭(稷崇)’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1104년(숙종 9)에 지공거(知貢擧) 정문(鄭文)과 동지공거 유재(劉載)가 주관한 과거에서 송위(宋瑋) 등과 함께 급제한 뒤 장사랑(將仕郎)·양온승동정(良醞丞同正)을 제수받았다.
예종(睿宗) 때는 1109년(예종 4) 식목녹사(式目錄事)에 발탁되었고, 1113년(예종 8)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어 송나라에 들어갔다가 휘종(徽宗)이 내려준 대성신악(大晟新樂)을 받아서 이듬해에 돌아왔다. 또한 1115년(예종 10) 권지지후(權知祗候)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와 통판서경유수사(通判西京留守事)가 되었다. 그 뒤, 감찰어사(監察御使)에 올랐다가 이부낭중(吏部郎中)·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옮겼으며, 예종 말년에는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로 파견되었다.
인종(仁宗) 때에는 1126년(인종 4)에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발생하자 왕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잘 지킨 공으로 형부시랑(刑部侍郎)·지제고(知制誥)에 제수되었다가 국자좨주(國子祭酒)·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하였고, 이듬해부터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오르고 공부상서(工部尙書)·삼사사(三司使)까지 맡았다. 1130년(인종 8)에는 간의(諫議)로서 당면한 정치 현안에 대한 소(疏)를 올렸다. 다음 해에는 직문하성(直門下省)이 되어 우간의(右諫讓) 이신(李伸), 중서사인(中書舍人) 임존(林存), 좌사간(左司諫) 최함(崔諴) 등과 함께 무인(武人)인 최봉심(崔逢深)이 동경지례사(東京持禮使)의 서장관(書狀官)을 맡을 수 없다고 간언하였다. 특히 묘청(妙淸)을 추종하면서 ‘나라에서 내게 장사 1천 명만 준다면 곧바로 금(金)에 들어가서 그 임금을 사로잡아 바치겠다.’고 주장했던 최봉심을 사신으로 보내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때 궁궐 문 앞에서 엎드려 사흘 동안 간언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그 뒤에 1134년(인종 12) 검교태자태부(檢校太子太傅)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이듬해에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