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平山)을 본관으로 하는 신씨(申氏)의 시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太祖)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했다고 하였으며, 『고려사』 신숭겸 열전(列傳)에는 광해주(光海州: 현,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인물조(人物條)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고 그의 묘도 춘천에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그는 본래 곡성 출신이었지만 뒤에 춘천으로 옮겨와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부모와 조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甫)도 『고려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초명은 능산(能山), 혹은 삼능산(三能山)이라 하였다. 『고려사』 신숭겸 열전과 『신증동국여지승람』(권46, 강원도 춘천도호부) 그리고 조선 후기에 편찬된 『평산신씨족보』 등에서는 능산(能山)이라 하였다. 그렇지만 1956년에 나온 『삼국사기색인』(연세대 동방학연구소 편), 북한의 고전연구실 번역본 『삼국사기』(1959), 이병도의 『국역 삼국사기』(1977), 신호열의 『삼국사기』 번역본(1976), 이재호의 『삼국사기』 번역본(1985),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과 정조묘(鄭早苗)의 『삼국사기』 일본어 역주본(1988), 이강래의 『삼국사기』 번역본(1998) 등에서는 ‘삼능산(三能山)’이라 하였다.
신숭겸은 몸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났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41, 황해도 평산도호부조)에는 신숭겸이 사냥터에서 날아가는 기러기들을 보고 태조에게 “몇 번째 기러기를 쏠까요?”라고 묻고, 세 번째 기러기를 쏘라는 태조의 말을 듣고 그대로 맞췄다는 기록도 있다.
궁예(弓裔) 밑에서 기장(騎將)으로 출세하였지만, 918년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과 함께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그 공으로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배현경과 함께 청주인(靑州人) 현율(玄律)이 순군낭중(徇軍郞中)에 임명된 것을 논박(論駁)하여 태조(太祖)로 하여금 병부낭중(兵部郞中)에 고쳐 제수하도록 하였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後百濟)와의 긴장관계는 견훤(甄萱)이 신라(新羅)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태조 10) 견훤이 고울부(高鬱府: 현, 경상북도 영천시)를 습격한 데 이어 신라 왕경까지 쳐들어가 경애왕(景哀王)을 시해하고 경순왕(敬順王)을 옹립하면서 약탈을 일삼았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고려군은 크게 패하였고 태조 역시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위급한 처지가 되었다. 신숭겸은 이때 대장(大將)으로 출전했다가 태조를 대신해서 투구와 갑옷을 빌려 입고 후백제군을 유인하면서 힘껏 싸우다가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함께 전사하였다. 태조는 이에 힘입어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탈출하여 살아날 수 있었다.
신숭겸이 자신을 대신해서 싸우다 전사하자, 태조는 크게 슬퍼하면서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甫)를 김락의 동생 김철(金鐵)과 함께 원윤(元尹)에 임명하였으며,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신숭겸과 김락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에 추증되어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1120년(예종 15)에는 예종(睿宗)이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잡희(雜戱)를 관람하다가 신숭겸과 김락의 모습을 한 우상(偶像)을 보고 감탄하여 시를 지었다. 신숭겸의 행적을 기록한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는 예종이 이때 지었다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도 전한다. 또한 1308년(충선왕 복위 1)에는 신숭겸을 김락 · 김철 형제와 함께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추증하면서 이들의 친가와 외가에 속한 현손(玄孫)의 현손까지 1호당 1명씩 첫 벼슬을 내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