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준은 고려 전기 어사대부,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예종 때 문음으로 양온서사동정에 처음 출사하여 광주감무까지 승진하였고, 인종 때 전중시어사·상주목부사·형부낭중·시어사중승 등을 거쳐 동북면병마사에 올랐다. 의종 때는 추밀원부사, 어사대부, 이부상서,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용장(用章)이다. 고조부는 상장군을 지낸 양유달(梁攸達), 증조부는 금오위상장군을 지낸 양일(梁逸), 조부는 정위(正位)에 제수된 양창(梁暢)이다. 아버지는 검교첨사(檢校詹事)를 지낸 양공소(梁公紹)이고, 어머니는 감찰어사를 지낸 박성덕(朴成德)의 딸인 음성군대군(陰城郡大君) 박씨이다. 부인은 음성현(陰城縣) 호장(戶長) 박경(朴卿)의 딸인 박씨와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노영(盧瑩)의 딸인 노씨가 있다. 자녀는 박씨 소생으로 승려가 된 자정(資挺)과 어사중승을 지낸 양문형(梁文熒) 등 두 아들이 있고, 노씨 소생으로는 딸 1명과 부음(父蔭)으로 장사랑(將仕郎)·양온서승동정(良醞署丞同正)을 지낸 양문수(梁文秀)가 있다.
1108년(예종 3)에 아버지의 외고조인 삼한공신(三韓功臣)·증태위(贈太尉) 최영휴(崔英休)의 문음(門蔭)으로 양온서사동정(良醞署史同正)이 되었다. 그 뒤에 좌우위사(左右衛史)·군기주부동정(軍器主簿同正) 등의 여러 서리직을 거쳐 1120년(예종 15)에 광주감무(光州監務)로 나아갔다.
인종(仁宗) 때는 1125년(인종 3)에 의친궁녹사(懿親宮錄事), 1134년(인종 12)에 참직(參職)으로 권지감찰어사(權知監察御史), 이듬해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1136년(인종 14)에 상주목부사(尙州牧副使), 1139년(인종 17)에 형부낭중(刑部郎中), 1143년(인종 21)에 시어사중승(試御史中丞) 등을 역임하고, 1145년(인종 23)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다.
의종(毅宗) 때는 1146년(의종 즉위) 금(金)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148년(의종 2) 시상서우승(試尙書右丞), 1150년(의종 4) 차호부상서(借戶部尙書)·지서경유수사(知西京留守事), 1151년(의종 5) 상서좌승(尙書左丞)·추밀원좌승선(樞密院左承宣)·지삼사사(知三司事), 1153년(의종 7)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어사대부(御史大夫), 1154년(의종 8)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와 이부상서(吏部尙書)·판형부사(判刑部事), 1156년(의종 10)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와 중서시랑(中書侍郎)·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同中書門下侍郎平章事) 등을 지낸 뒤 이듬해에 치사(致仕)하였다. 1158년(의종 12)에는 특별히 수사도(守司徒)와 태자태보(太子大保)를 제수받았다. 이해 11월에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양원준은 서리 출신으로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으며, 성품이 순박하고 정직하여 한결같이 절도가 있었다. 선물이나 사례도 모두 통하지 않을 정도로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살림살이를 돌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광주의 수령으로 있을 때 아내가 어머니를 공손하게 모시지 않는다고 쫓아냈는데, 아내와 아이가 울면서 애걸해도 끝내 허락하지 않아서 어질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의종이 정함(鄭諴)을 임용한 것에 대해 간관(諫官)들이 논박하였을 때, 양원준은 끝까지 자기의 의견을 고치지 않고 버텼기 때문에 당시의 여론[시의(時議)]이 그를 중히 여겼다. 아들 양문형도 아버지의 풍모를 지니고 있어서 청렴 강직하였다고 한다.
양원준이 죽었을 때, 의종은 국례(國禮)로 장사지내도록 하고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