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보(邵台輔)의 가계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문종(文宗) 때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임명되었으며, 선종(宣宗) 때는 1086년(선종 3)에 형부상서(刑部尙書)로서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에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다. 1091년(선종 8)에는 좌복야(左僕射)에 올라 왕이 상춘정(賞春亭)에 마련한 술자리에서 계림공(鷄林公) 왕희(王熙), 부여공(扶餘公) 왕수(王㸂), 문하시랑평장사 유홍(柳洪), 병부상서 서정(徐靖), 상장군 왕국모(王國髦), 직문하성 고경(高景), 한림학사 손관(孫冠) 등과 함께 참석하여 변방의 일에 대해 논의하였다. 다음 해에는 참지정사(叅知政事)에 임명되었다가 권판서북면병마사(權判西北面兵馬事)와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를 겸하였다. 1093년(선종 10)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와 판형병부사(判刑兵部事)를 겸한 뒤에 호시(互市)를 열어 이익을 제공함으로써 북로(北路)의 변경에 있는 장사(將士)들을 관리하는 대책까지 마련하였다.
헌종(獻宗)이 즉위한 뒤에는 이자위(李子威)와 함께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상주국(上柱國)에 올랐다. 이때는 이자연(李子淵)의 손녀로서 선종의 제2비이자 헌종의 생모인 사숙태후(思肅太后)가 섭정(攝政)하였는데, 이자연의 또다른 손자인 이자의(李資儀)가 1095년(헌종 1)에 자신의 친동생이자 선종의 제3비 원신궁주(元信宮主) 소생의 한산후(漢山侯) 왕윤(王昀)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다.
이에 맞서던 선종의 친동생이자 헌종의 숙부 계림공 왕희가 도움을 요청하자, 소태보는 상장군 왕국모에게 시위를 맡기고 장사(壯士) 고의화(高義和)로 하여금 이자의와 그의 아들 및 당여 17명을 잡아 죽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자의와 결탁한 문하시랑평장사 이자위(李子威)와 소경(少卿) 김의영(金義英) 등 50여 명을 남쪽 변방에 유배 보냈다.
소태보는 그 뒤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에 올랐다가 다시 특진(特進)·수사도(守司徒)·판이부사(判吏部事)에 임명되었다. 이해 10월에 계림공 왕희가 왕위에 오르자, 수태위(守太尉)·문하시중(門下侍中)에 발탁되었다. 그리고 1098년(숙종 3) 원자를 태자로 세울 때 태사(太師)에 제수되었다.
1102년(숙종 7)에는 국학(國學)을 폐지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103년(숙종 8)에는 70세에 이르러서 치사(致仕)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숙종(肅宗)이 허락하지 않고 상서병부낭중 허경(許慶)을 보내어 궤장(几杖)을 하사하면서 도리어 수태부(守太傅)·판호부사(判戶部事)·서경유수사(西京留守事)에 제수하였다. 그 뒤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치사(致仕)하였으나, 1104년(숙종 9) 5월에 다시 수태사(守太師)에 올랐다.
한편, 김부식(金富軾)이 쓴 「도솔원종명병서(兜率院鍾銘幷序)」에 따르면 소태보가 문하시중으로 있으면서 숭교사(崇敎寺)의 주지 승통(僧統) 홍천(弘闡)과 함께 발원(發願)하여 도솔원(兜率院)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의 집은 수창궁(壽昌宮) 옆에 있었는데, 1129년(인종 7)에 인종(仁宗)이 서적소(書籍所)로 삼아서 문헌을 수집하여 모으고 대사성(大司成) 김부철(金富轍)과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임완(林完)에게 여러 유신(儒臣)과 함께 번갈아 가면서 당직을 세우게 했다고 한다.
1104년(숙종 9) 협모공신(協謀功臣)의 호를 받았다. 시호는 충겸(忠謙)이다. 뒷날 수사공(守司空)·좌복야(左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오른 경렬공(景烈公) 왕국모(王國髦), 수태위·중서령에 오른 충경공(忠景公) 최사추(崔思諏)와 함께 숙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