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아버지는 신종의 둘째아들인 덕양후(德陽侯) 왕서(王恕)이다. 대몽항쟁기에 외교관계에서 활동하였다.
1257년(고종 44) 몽고군의 사령관인 자랄타이[車羅大]가 고려에 대한 무력적 압력을 가중시키면서 국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하자, 그 둔소(屯所)에 파견되어 자랄타이를 설득, 일단 봉주(鳳州: 지금의 황해도 봉산)로 후퇴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듬해 다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김보정(金寶鼎)과 함께 자랄타이의 둔소에 파견되어 국왕 및 태자의 출항(出降) 요구를 무마하였다.
1260년(원종 1) 원나라 세조(世祖)의 즉위사(卽位使)로 사행하여, 무력정벌에서 회유정책으로 대고려정책의 전환을 선언하는 세조의 조서(詔書)를 받아오기도 하였다. 작호는 영안공(永安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