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1094∼1095. 이름은 왕욱(王昱). 선종의 원자(元子)로 어머니는 사숙태후 이씨(思肅太后 李氏)이다.
즉위 초에는 어리고 병약하였으므로 태후가 청정(聽政)하여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모두 처결하였다.
1095년(헌종 1) 정월 초하루에 해 옆에 혜성(慧星)이 나타났는데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해의 곁에 혜성이 있음은 근신(近臣)의 난이 있을 징조이니, 제후 중에 반(反)하려는 자가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타고난 천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지만 나이가 어려 수성(修省)할 줄 모르고, 다만 내의(內醫) 3, 4명을 불러들여 방서(方書)를 토론하고, 혹은 서화를 익힐 뿐이었다.
같은 해 7월에 과연 이자의(李資義)가 반란을 꾀하였으나, 오히려 주살되고 난은 진압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선종은 총명한 아우가 5명이나 있었는데도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였으므로 이런 반란이 일어났다.”고 애석해하였다.
난적(亂賊)을 토벌한 공으로 소태보(邵台輔)는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 왕국모(王國髦)는 권판병부사(權判兵部事)가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계림공 왕희(鷄林公 王熙: 뒤의 숙종)가 중서령으로 임명되더니 그해 10월에 어린 조카를 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헌종이 제서(制書)를 내려 선위(禪位)할 때 근신 김덕균(金德均)을 보내어 계림공 왕희를 종저(宗邸)에서 맞이하고, 자신은 후궁으로 물러났다. 왕위를 물러난 지 2년 뒤에 죽었다. 시호는 회상(懷觴), 예종 때 공상(恭觴)으로 바꾸었다. 능은 개성에 있는 온릉(穩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