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박경작(朴景綽), 자는 영유(令裕). 할아버지는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지낸 박충후(朴忠厚)이고, 아버지는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박인량(朴寅亮)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경적(經籍)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한 뒤 주로 간쟁(諫諍)과 문한(文翰)의 직을 맡아 이름을 떨쳤다.
1108년 병마부사(兵馬副使)로서 윤관(尹瓘)을 따라 여진정벌군에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정주(定州)에 머무르고 있을 때 윤관이 9성을 쌓는다는 말을 듣고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하고, 또 전중감(殿中監)·직문하(直門下)로서 송나라와의 국교를 재개하려는 것을 중지시켰다.
1113년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1115년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떠날 때 예종(睿宗)은 ‘경인(景仁)’이라는 이름과 차와 약을 하사하였다. 이로써 이름을 ‘경인’이라 개명하였다.
이듬해 한림학사승지로 청연각(淸讌閣)에서 『서경(書經)』을 강하였으며, 김연(金緣) 등 여러 학사들과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주석하였다. 형부·이부·호부·예부의 상서(尙書)를 거쳐 1119년 지추밀원사에 오르고 나중에는 수사공(守司空)·상서좌복야(尙書佐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동생인 박경백(朴景伯)·박경산(朴景山)과 더불어 삼형제가 모두 등과하여 박경인의 어머니는 매년 대창미(大倉米) 30석이 하사되는 은전을 누렸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