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인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전기에, 서북면병마사,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영유(令裕)
시호
장간(章簡)
이칭
박경작(朴景綽)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057년(문종 11)
사망 연도
1121년(예종 16)
본관
평산(平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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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전기에, 서북면병마사,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박경작(朴景綽), 자는 영유(令裕). 할아버지는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지낸 박충후(朴忠厚)이고, 아버지는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박인량(朴寅亮)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경적(經籍)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한 뒤 주로 간쟁(諫諍)과 문한(文翰)의 직을 맡아 이름을 떨쳤다.

1108년 병마부사(兵馬副使)로서 윤관(尹瓘)을 따라 여진정벌군에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정주(定州)에 머무르고 있을 때 윤관이 9성을 쌓는다는 말을 듣고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하고, 또 전중감(殿中監)·직문하(直門下)로서 송나라와의 국교를 재개하려는 것을 중지시켰다.

1113년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1115년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떠날 때 예종(睿宗)은 ‘경인(景仁)’이라는 이름과 차와 약을 하사하였다. 이로써 이름을 ‘경인’이라 개명하였다.

이듬해 한림학사승지로 청연각(淸讌閣)에서 『서경(書經)』을 강하였으며, 김연(金緣) 등 여러 학사들과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주석하였다. 형부·이부·호부·예부의 상서(尙書)를 거쳐 1119년 지추밀원사에 오르고 나중에는 수사공(守司空)·상서좌복야(尙書佐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상훈과 추모

동생인 박경백(朴景伯)·박경산(朴景山)과 더불어 삼형제가 모두 등과하여 박경인의 어머니는 매년 대창미(大倉米) 30석이 하사되는 은전을 누렸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박경인묘지(朴景仁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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