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은 오경의 하나로, 고대 중국의 정치를 기록한 유교 경전이다. 고대에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 변동, 문물 제도 등을 사관이 낱낱이 기록한 책을 서(書)라고 하였다. 때로는 왕조의 이름을 붙여 우서, 하서라고도 하였다. 공자는 이 서를 대단히 중히 여겨 번잡한 것을 정리해 다시 편찬하고, 시경과 함께 교육의 핵심적인 과목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경』은 주로 정치 상황을 담고 있지만, 천문, 지리, 윤리, 민생 문제도 담고 있다. 이에 정치서로는 으뜸으로 꼽았으며 삼경 또는 오경에 넣어 존중해 왔다.
오경(五經) 중의 하나로, 중국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정치를 기록한 책이다. 고대에는 제도상으로 사관(史官)이 있어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 변동 · 문물 제도 등을 낱낱이 문자로 기록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옛날에는 그저 서(書)라 일컬었으며 때로는 왕조(王朝)의 이름을 위에 얹어 우서(虞書) · 하서(夏書) 등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공자(孔子)는 이 서를 대단히 중히 여겨 번잡한 것을 정리해 다시 편찬했다는 설이 있으며, 시(詩)와 더불어 제자들의 교육에 핵심적인 교과 과정으로 삼았다.
한대(漢代) 이후 『상서(尙書)』라 일컬었는데, 상(尙)은 상(上)과 통하여 ‘상대(上代)의 서(書)’라는 뜻이라고 한다. 송대에 와서는 다시 『서경(書經)』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경(經)은 경전(經典)이라는 말로 성인이 산정(刪定)한 책이라는 존중의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는 『상서』 · 『서경』의 두 명칭이 통용되고 있으며, 고증이 어렵고 난해한 글로 알려져 있다.
전통적으로 『서경』은 이른바 이제삼왕(二帝三王)의 수제치평(修齊治平)의 도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유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제왕으로 추숭하는 요(堯) · 순(舜) 이외에 우(禹) · 탕(湯) · 문무(文武) 삼왕을 합해 이들이 몸을 닦고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그 덕을 더욱 펼쳐서 나라를 다스리고 결국 온 천하에 평화를 이룩한 도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모든 경전 중에서 정치서로는 으뜸으로 꼽았으며 삼경 또는 오경에 넣어 존중해 왔다.
공자가 산정한 뒤 전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서경』은 많이 산일되었다.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난을 만나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가 한대에 이르러 금서율(禁書律)이 해제되자 다시 햇볕을 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금문상서(今文尙書)』 · 『고문상서(古文尙書)』 · 『위고문상서(僞古文尙書)』 등의 일컬음이 생기게 되었다.
『금문상서』는 진(秦)나라의 박사(博士)였던 복승(伏勝, 伏生)이 은밀히 『서경』을 벽 속에 감추고, 난을 피해 사방으로 흘러다니다가 평화를 되찾은 뒤 돌아와서 벽을 열어 보니 겨우 28편(혹은 29편)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당시 통용되는 문자인 금문(今文)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승이 벽 속에 감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외어 두고 있다가 구전(口傳)한 것이며, 다시 문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당시 쓰던 문자인 금문으로 정착을 시켰다는 설도 있다. 이 28편(29편)의 글이 『금문상서』이다.
후한 경제(景帝) 때 노(魯)나라의 공왕(恭王)이 집을 넓히려고 공자의 구택(舊宅)을 부수었는데 벽 속에서 많은 고서가 나왔다. 이 고서들을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이 정리하면서 그 중의 『서경』을 이미 알려져 있는 『금문상서』와 비교해 16편을 더 찾아냈는데, 이를 『고문상서』라 한다.
그 뒤 성제(成帝) 때 장패(張覇)라는 사람이 다시 고문 102편을 얻어 임금에게 바쳤는데, 이것은 위서(僞書)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위고문상서』라고 한다. 그 뒤 동진(東晉) 원제(元帝) 때 매색(梅賾)이라는 사람이 『고문상서』를 헌상하였는데, 공안국의 전(傳 : 注解)까지 곁들여 모두 58편이나 되었다. 그 내용은 『금문상서』와 일치하는 33편과, 달리 불어난 고문계(古文系) 25편으로 되어 있었다.
이 매색의 헌상본은 위고문(僞古文)이라는 설이 분분하였고, 공안국전은 위공전(僞孔傳)이라 하여 위서로 낙인이 찍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에 이르러 공영달(孔穎達)이 『상서정의(尙書正義)』를 편정할 때 이것을 정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널리 세상에 통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읽혀지고 있는 『서경집주(書經集註)』도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서경』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 이제삼왕(二帝三王) 시대의 기록으로 사관에 의해 작성된 것이며, 주로 정치 상황을 내용으로 담고 있지만, 당연히 천문 · 지리 · 윤리 · 민생 문제로 광범위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정치 상황의 기록이라 하더라도 철학적 · 사상적 면모도 무시할 수 없으며, 전체를 일관하는 애민(愛民) · 중민(重民)사상은 공자와 맹자(孟子)로 계승되어 민본주의(民本主義)로 정착이 되었다.
이상 정치의 실현을 위해 내세운 명덕신벌론(明德愼罰論)은 후세의 현실 정치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오전(五典) · 오교(五敎)는 오륜(五倫)으로 발전하여 유교 도덕의 핵심이 되어 오늘날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윤리를 설정하는 데 기준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자제 교육의 교재로 사용한 기록이 있으며, 경주에서 출토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는 두 젊은이가 3년 안에 『시경』 · 『서경』 · 『예기』 · 『좌전』을 익힐 것을 맹세한 것으로 보아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신년은 732년(신라 성덕왕 31)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에는 과거의 중요한 과목이었으며 정주학(程朱學)을 수용한 이후 『서경집주』가 통용되었는데, 주자(朱子)가 못다한 주석을 제자 채침(蔡沈)이 완성하였다.
조선 초기의 학자 권근(權近)이 구결(口訣)도 붙이고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저술했다고 하는데, 『예기』 · 『주역』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볼 수가 없다. 이언적(李彦迪) · 조광조(趙光祖) 등 초기 학자의 선도적 연구에 이어, 이황(李滉) · 이이(李珥) 등 많은 학자들이 사상적으로 부연하는 글들을 문집에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