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은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승려 묘청을 비롯하여 문신 정지상(鄭知常), 일자(日者)인 백수한(白壽翰) 등 서경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일군의 세력이 당시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지리 도참설을 근거로 삼아 개경에서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 금국정벌(金國征伐)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조정의 반대에 부딪치자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 등의 반란은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고려 인종 대에 있었던 승려인 묘청(妙淸)을 비롯하여 문신인 정지상(鄭知常), 일자(日者: 날의 길흉을 점치는 사람)인 백수한(白壽翰) 등 서경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일군의 세력이 당시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지리 도참사상을 근거로 삼아 개경으로부터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였으나, 반대에 부딪치자 서경을 중심으로 일으킨 반란 사건이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의 난 이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졌고, 밖으로는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 시기에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거,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개경(開京)의 지덕(地德)이 쇠약한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나라를 중흥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어서 그는 인종의 총애와 함께 백수한 · 정지상 등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인종은 1127년(인종 5) 이후 서경에 자주 거둥했고, 그의 건의에 따라 서경의 명당인 임원역(林原驛: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신궁동)에 대화궁(大花宮)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서경 천도 계획에 반대하는 세력도 많았다.
특히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나라도 항복할 것이며, 많은 나라가 조공할 것이라고 했으나 준공 뒤에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대화궁 근처 30여 곳에 벼락이 치고, 인종의 서경 거둥 도중 갑작스러운 폭풍우로 수많은 인마가 살상되기도 하였다. 이에 묘청 일파를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며, 김부식(金富軾)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마침내 인종은 서경 거둥을 단념, 서경 천도 계획도 그만두게 되었다.
묘청 일파의 정치적 목표는 부패하고 무기력한 개경 귀족 대신 서경인 중심의 새 정권을 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금국정벌론 등 자주적 기백과 내정 혁신의 의욕도 보였으나, 인심을 현혹시키는 얕은 속임수가 발각되고 재앙이 자주 생겨 서경 천도 계획을 배척하는 여론이 고조되어 갔던 것이다. 서경 천도 운동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은 1135년(인종 13) 정월 서경의 분사시랑(分司侍郎) 조광(趙匡), 병부상서(兵部尙書) 유참(柳旵) 등과 함께 반기를 들고, 부유수(副留守) 이하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들과 서경에 와 있던 상경인(上京人: 개경인(開京人))들을 잡아 가두었다. 그리고 자비령(慈悲嶺) 이북을 차단, 서북면 내의 모든 군대를 서경에 집결하게 하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라고 하였다.
이에 정부는 김부식을 평서원수(平西元帥)로 임명,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먼저 묘청의 일파로서 개경에 있던 백수한 · 정지상 · 김안(金安) 등을 처형, 후환을 없앴다. 그리고 좌 · 우 · 중 3군을 거느리고 평산역(平山驛), 관산역(管山驛: 신계(新溪)), 사암역(射嵓驛: 수안(遂安))을 거쳐 성천(成川)에 이르러 토적(討賊)의 격문을 여러 성에 보냈다. 다시 3군을 지휘해 연주(漣州: 연주(蓮州))를 거쳐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 안주(安州))에 다다랐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성들이 정부군에 호응, 협력하였고, 정세는 정부군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김부식은 7, 8차례에 걸쳐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군의 실권자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묘청 · 유담 · 유호(柳浩: 유담의 아들)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경(分司大府卿) 윤첨(尹瞻) 등에게 주어 개경으로 보냈으나, 개경 정부는 윤첨 등을 옥에 가두었다. 이 사실을 안 조광 등은 항복해도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 끝까지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서경 반란군은 정부의 어떠한 회유 교섭도 거절하였다. 인종이 보낸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김부(金阜), 내시 황문상(黃文裳)을 죽였으며, 김부식이 보낸 녹사(錄事) 이덕경(李德卿)도 죽였다. 이와 함께 선요문(宣耀門)에서 다경루(多景樓)까지 강을 따라 1,730칸의 성을 쌓고, 그 사이에 여섯 문을 만들어 놓았다.
정부군은 서경성 바로 밑까지 진격하여 중 · 좌 · 우 · 전 · 후의 5군이 성을 포위했으나, 반란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고전하였다. 이처럼 반란군은 1년 넘게 항전을 계속했으나,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사기가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마침내 1136년 2월 정부군은 총공격을 감행, 서경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조광 등 반란군의 지도자들이 자결함으로써 반란은 끝나게 된 것이다.
견해에 따라서는 묘청파와 정지상파의 대립은 정치 주도권을 둘러싼 친왕적 고위 관료 대 친왕적 하위 관료의 대립으로 보거나, 서경 천도를 주장한 인물들은 승려나 일자, 환관, 과거 합격자 출신의 중앙 관리나 무인이었으며, 이들 상당수는 서경과 무관한 존재들로 국왕의 측근으로 보면서, 서경 천도를 주장한 인물들이 묘청을 내세웠으나, 정지상 등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난의 특징은 왕권에 도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첫째, 국호 · 연호 등은 제정하면서 왕을 새로 옹위하지 않은 점, 둘째, 왕에게 거사 소식을 직접 전달한 점에서 서경 세력과 개경 세력 간의 다툼으로 파악될 수 있다.
신채호(申采浩)는 이 난을 낭불양가(郎佛兩家: 낭가(郎家)와 불가(佛家))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하였다.
난이 고려 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우선, 서경의 권력 구조상의 지위가 격하되면서, 고려 권력 구조의 균형이 깨졌다. 즉, 개경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 왔던 서경 세력의 쇠퇴는 개경의 문신 귀족 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문신 귀족 세력은 왕권마저 능멸하게 되었다. 따라서, 문신 귀족 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적 · 사회 경제적인 모순과 폐단은 이후 무신정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묘청의 난은 한계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난을 일으킨 이들이 제시하고 추진하던 칭제건원(稱帝建元: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세움)과 금국정벌(金國征伐)은 비현실적이거나 실체가 모호하다는 점이었다. 즉 묘청 일파가 내건 칭제건원론과 금국정벌론은 일면 많은 고려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그 운동에 힘을 줄 수 있었으나 치명적 한계 또한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