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6년(인종 4)에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나고, 그 진압 후에도 국내외 정세는 불안하였다. 그 때 서경 출신 승려 묘청(妙淸)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천도를 주장하였다.
왕조 질서의 재편을 뜻하는 이 서경천도계획이 개경 귀족세력의 완강한 반대로 실패하자, 묘청·조광(趙匡) 등과 더불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개경정부군이 출동하고, 평주판관(平州判官) 김순부(金淳夫)가 조서를 가지고 입성하여 반란군을 설유(說諭)할 때, 변심한 부하 조광에 의하여 그의 아들 유호(柳浩)와 함께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