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무안(務安). 자(字)는 자천(子千). 현종(顯宗) 때 남행호종공신(南幸扈從功臣)인 박섬(朴暹)의 증손이다. 아들로는 박심조(朴深造)·박심도(朴深道)·박심봉(朴深逢)·박심통(朴深通)이 있다.
문과에 급제하여 상안부녹사(常安府錄事)에 보임된 뒤 중서주서가 되었다. 1106년(예종 1) 김연(金緣), 김인존(金仁存)· 최선(崔璿)·이재(李載)· 이덕우(李德羽) 및 태사관(太史官)과 더불어 여러 음양지리서를 검토·정리하여 『해동비록(海東祕錄)』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또한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로서 박경작(朴景綽: 박경인(朴景仁)의 초명)· 김황원(金黃元) 등과 상정관(詳定官)이 되어 예의(禮儀)를 정하였다.
1107년(예종 2)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요나라에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賀禮)하였다.
1109년(예종 4) 예부낭중으로 호부낭중 한상(韓相)과 함께 여진족에게 9성(城)을 돌려주자고 하는 데 반대하였다.
1111년(예종 6) 중서사인을 거쳐 1113년(예종 8) 시강학사(侍講學士)로서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김연과 더불어 『시정책요(時政策要)』 5책을 편찬하였다.
1114년(예종 9) 예종이 국학(國學)에 행차해 한림학사이던 박승중에게 대사성(大司成)을 가차하고 『서경(書經)』의 열명(說命) 3편을 강론하도록 하였다. 이때 백관 및 생원 700여 인이 뜰에 서서 강론을 듣고 각각 가송(歌頌)을 올렸다.
1115년(예종 10)에 동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선발했으나 급제자의 대책(對策)이 옛 작품을 답습하였다고 하여 왕이 직접 복시(覆試)를 보고 김정(金精) 등 39명에게 급제를 내려주었다.
1116년(예종 11) 국자좨주(國子祭酒)·한림학사((翰林學士)·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었으나 청연각에서 시신(侍臣)을 비평하여 판장작감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한림학사(翰林學士)·지예부사(知禮部事)를 거쳐, 이해에 청연각에서 『시경(詩經)』 관저편(關雎篇)을 강의하였다.
1118년(예종 13) 장경도량(藏經道場)이 설치되어 향을 나누어 주기 위해 시신의 반차(班次)를 작성하던 중, 홍관(洪灌)· 이숙(李璹)과 더불어 웃고 말하는 소리가 어소(御所)에까지 들려 대관(臺官)의 탄핵으로 파면되었다.
이어 한림학사승지가 되었다. 그때에 가뭄이 들어 왕이 청연각에 나와 그에게 『서경』 홍범편(洪範篇)을 강론케 하였더니 우연히 비가 크게 내렸다.
1122년(예종 17) 좌산기상시로서 지공거를 역임하고,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보문각학사로 김부식(金富軾)· 정극영(鄭克永)과 더불어 『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수관이 되었다.
1123년(인종 1) 추밀원사가 되었으며, 이자겸(李資謙)이 국정을 맡게 되자 허재(許載)·최식(崔湜) 등과 더불어 한패가 되었다. 이어 상주하여 이자겸에게 중서령을 가하고 조선국공(朝鮮國公)을 봉하게 하였으며, 왕태자의 예수(禮數)에 의거해 부(府)를 세우고 요속(寮屬)을 두게 하였다.
또한 예사(禮司)를 시켜 이자겸의 생일에 호를 정하게 하였으나 따르지 않으니, 스스로 인수절(仁壽節)이라 이름하여 온갖 아부를 다하였다.
이러한 추종으로 1125년(인종 3) 검교사공(檢校司空)·정당문학(政堂文學)·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에서 참지정사를 거쳐 수태위(守太尉)·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로 승진하였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몰락하자 간관의 탄핵을 받고 울진(蔚珍)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128년(인종 6) 문학을 잘하여 여러 대를 섬긴 공로가 참작되어 무안으로 옮겨진 뒤, 그 곳에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