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무당(無黨). 당성군(唐城郡) 출신. 『남양홍씨보(南陽洪氏譜)』에는 시조 홍은열(洪殷悅)의 5세손, 군기감사(軍器監事) 홍덕승(洪德升)의 아들로 되어 있다.
1103년(숙종 8) 직사관(直史館)으로서 왕명을 받아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을 병풍에 썼다. 1111년(예종 6) 2월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이듬해는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다. 1113년 8월 예부상서(禮部尙書)로서 요(遼)에 정사(正使)가 되어 부사(副使)인 형부시랑(刑部侍郎) 김의원(金義元)과 함께 다녀왔다.
1114년 12월 문덕전학사(文德殿學士)가 되고, 1116년 7월 청연각학사, 1118년 정월 보문각학사가 되었다. 청연각에서 『서경(書經)』「순전(舜典)」을 시강(侍講)하였다. 예종의 명으로 이궤(李軌) · 허지기(許之奇) · 박승중(朴昇中) · 김부일(金富佾) · 윤해(尹諧) 등의 학사들과 함께 삼한 이래의 사적을 모아 『편년통재속편(編年通載續編)』을 찬진하였다.
1116년 2월 국자좨주(國子祭酒)로서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시관(試官)이 되어 유승단(柳升旦) 등 99인을 뽑았다. 1123년(인종 1)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임유문(林有文)과 함께 진사를 취해 변순부(卞純夫) 등 30인을 급제시켰다.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를 지내던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났다. 그 때 도성(都城)에서 직숙(直宿)하다가 변고를 듣고 들어가 왕을 시위하였다. 왕이 연덕궁(延德宮)으로 옮기게 되자 노병(老病)의 몸으로 뒤따라가다가 서화문(西華門)에서 척준경(拓俊京)의 난군에게 살해당하였다.
과거에 급제해 1102년(숙종 7) 사관(史館)의 직사관(直史館)으로서 왕명으로 신축된 집상전(集祥殿: 왕의 정전)의 편액을 썼다. 신라 김생(金生)의 필법을 본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경전(會慶殿) 병풍에 『서경』의 무일편(無逸篇)도 썼다고 전해지며,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보문각(寶文閣) · 청연각(淸讌閣) · 보전화루(寶殿畵樓)의 편액도 홍관의 글씨라고 전한다.
이후 홍관의 순절을 포상해 추성보국공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예부사 상주국(推誠報國功臣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禮部事上柱國)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평(忠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