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준경은 고려전기 이부상서 참지정사, 문하시랑 판병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144년(인종 22)에 사망했다. 가난하여 학문을 닦지 못하고 무뢰배들과 교유하다가 후에 숙종으로 즉위한 계림군의 종자로 들어가 무관의 길을 걸었다. 윤관을 따라 동여진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인종의 묵인 아래 이자겸 제거 거사가 일어나자 이자겸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궁궐을 불사르고 진압했다. 이후 인종의 설득으로 이자겸 제거에 앞장섰고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인종이 그 공로를 인정하여 복권시켰으나 얼마 후 사망했다.
곡산척씨(谷山拓氏)의 시조. 아버지는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척위공(拓謂恭)이다.
주리(州吏)의 집안으로 가난해서 학문을 닦지 못하고 서리(胥吏)가 되고자 했으나 이것도 여의치 않아 무뢰배들과 교유하였다. 이후 계림공(鷄林公)의 종자로 있다가 추밀원별가(樞密院別駕)가 되었다.
1104년(숙종 9) 평장사(平章事) 임간(林幹)을 따라 동여진(東女眞) 정벌에 공을 세워 천우위녹사 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에 제수되었다.
1107년(예종 2) 중군병마녹사(中軍兵馬錄事)로 윤관(尹瓘)을 따라 동여진 정벌에 종군해 석성(石城) · 영주(英州)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그 공으로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제수되고, 다시 길주(吉州)전투에서 공을 세워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이 되었다.
1117년 급사중(給事中)으로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고,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를 역임하였다.
1119년 동북면병마사, 1122년 위위경 직문하성(衛尉卿直門下省)을 거쳐 1123년(인종 1)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이듬 해 개부의동삼사 검교사도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開府儀同三司檢校司徒守司空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하지만 곧 관직에서 물러나 스스로 고향인 곡주로 돌아가자 인종이 이를 만류하며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전보(轉補)하였다.
1126년 내시지후(內侍祗候) 김찬(金粲),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鱗) 등의 거사를 계기로 이자겸(李資謙)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궁궐에 침범하여 불사르고 이들을 살해하였다.
이어 문하시랑 판병부사(門下侍郎判兵部事)가 되었으나, 왕의 밀지를 받은 최사전(崔思全)의 설득으로 뜻을 바꾸어 이자겸을 잡아 귀양보냈다. 그 공으로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에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檢校太守太保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戶部事兼西京留守使上柱國)이 되고, 처 황씨(黃氏)는 제안군대부인(齊安郡大夫人)이 되었다.
이듬 해 권세를 함부로 부려 인종의 미움을 받다가 1127년에 “이자겸을 제거한 일은 일시의 공(功)이나, 궁궐을 침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萬世)의 죄다.”라는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을 받아 암타도(巖墮島)에 유배되고, 이듬해 곡주로 이배되었다.
1130년에 “죄는 중하나 또한 공도 적지 않다.” 하여 처자에게 직전(職田)을 돌려주었다.
1144년에 지난 날의 공으로 조봉대부 검교호부상서(朝奉大夫檢校戶部尙書)에 기용되었으나 곧 별세하였다. 1146년 문하시랑평장사로 추복(追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