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수부(統帥府)로서의 광군사는 947년(정종 2) 개경에 설치되었고, 『고려사』 백관지(百官志) 제사도감각색(諸司都監各色) 광군사조(光軍司條)에 의하면, 그 명칭이 광군도감(光軍都監)으로 바뀌었다가 1011년(현종 2) 광군사로 다시 복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광군사의 존재는 광군이 비록 각지의 호족 지휘 아래 농민으로 조직된 예비군이라 하더라도, 중앙정부의 전국적인 통제 아래 통일된 군사조직이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특히, 광군사를 광군도감으로 개칭한 것은 당나라의 부병제로 병제를 개혁하려는 의도 아래 시행되었음을 의미한다. 광군사가 광군도감으로 개칭된 것은 광군을 개편하여 중앙의 육위(六衛)에 소속하는 지방의 절충부(折衝府)로 만드는 일을 관장하여 처리하게 하기 위한 관사(官司)로 전환시키기 위한 조처로 추측된다.
그러나 1011년에 다시 광군도감을 광군사로 환원시킨 것은 당나라의 부병제를 모방하여 실시해보려던 노력이 실패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요컨대, 광군사란 호족 지휘 아래의 군사력을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장하기 위한 전 단계의 조처로 시행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친 뒤 지방의 농민군은 주현군으로 개편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