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군은 고려 전기 남도 주·현에 배치된 지방군이다. 지방 호족세력이 소유하였던 사병과 그 지방의 주민이 국가의 군대로 편성되는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990년 2군 6위의 중앙군과 함께 조직이 정비되었다. 995년 12목을 12군절도사로 개편하였다가 1012년 폐지되면서 지방군 조직으로 흡수되었다. 군역을 감당할 신체적 조건과 경제력 능력을 갖춘 상층 농민에서 징발하였고, 군역 수행의 대가로 군인전이 지급되었다. 몽고와의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군역담당층이 몰락하고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어 유지되지 못하였다.
5도(五道)와 경기(京畿) 내의 군사도(軍事道)를 단위로 배치된 군대로서 보승(保勝) · 정용(精勇) ·1품(一品) 등의 병종으로 구성되었다.
보승 · 정용은 전투부대로서 교대로 번상하여 2군6위(二軍六衛)의 보승 · 정용을 구성하였고, 1품군은 노동부대로서 각종 노역에 동원되었다. 또한 거주 군 · 현(郡縣) 내에서만 동원되는 촌류 2·3품군(村留 二三品軍)도 있었다.
주현군(州縣軍)은 지방 호족세력(豪族勢力)이 소유하였던 사병과 그들의 장악하에 있던 주민이 국가의 군대로 편성되는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일리천전투(一利川戰鬪)시 고려의 총병력이 약 10만이었으나 정종대에 30만의 광군(光軍)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국초부터 진행된 호적(戶籍)과 군적(軍籍)의 정비를 토대로 그동안 통제 밖에 있던 신라와 후백제 지역의 인구를 직접 장악한 결과였다.
정종대의 광군 조직은 명분상으로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통일 이후 호족의 수중에 있던 사병들을 국가가 장악하기 위한 조치였다. 광종대에는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과 함께 군사기구의 정비가 이루어졌는데 순군부(徇軍府)를 군부(軍部)로 개편한 것은 지방호족의 군사력이 국가에 장악됨에 따라 이들의 군사력에 대한 순행이나 감독 등 순군부의 기능이 변화하게 된 결과였다.
성종대에는 지방관을 파견하고 지방의 이직(吏職)을 개혁하였다. 군사업무와 관련된 병부와 병부 소속의 이직을 사병(司兵)과 병정(兵正) · 부병정(副兵正) · 병사(兵史) 등으로 개칭하여 중앙의 병부와 구분하고 그 격을 낮추는 동시에 국가의 지배체제하로 편입시켰다.
987년(성종 6)에는 통일전쟁 중에 과잉 생산된 무기를 회수하여 농기구를 주조하게 하였는데 이는 지방 호족의 잔존 군사력에 대한 완전한 무장해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업의 바탕 위에서 990년(성종 9)에 6위의 모체가 되는 좌우군영(左右軍營)의 설치를 시작으로 2군6위의 중앙군과 주현군 조직의 정비가 진행되었다.
995년(성종14)에 12목(十二牧)이 12군절도사(十二軍節度使)로 개편되었는데 주현군은 바로 이 절도사 휘하의 12군 편제에서 싹튼 것이다. 1012년(현종 3)에 12군절도사가 폐지되면서 그 군대가 지방군 조직으로 흡수되어 주현군이 성립하였고 그 완성은 1018년(현종 9) 무렵으로 추측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 주현군조에 의하면 주현군은 보승 · 정용 ·1품 등의 병종으로 구성되었다. 5도와 경기 내의 보다 세분된 군사도를 단위로 각 병종의 군액이 기록되어 있는데 군사도는 수령이 파견되는 주현(主縣)이었다. 그러나 주현군은 주현(主縣)만이 아니라 속현(屬縣)에도 배치되었으므로 군액은 속군현을 포함한 관내 병력의 합계라 할 수 있다.
한편 중앙의 파악 대상에서 빠져 있지만 1품군과 마찬가지로 노동부대인 촌류 2·3품군이라 불리는 병종도 있었다. 군사도를 단위로 기록된 전체 군액은 보승 8,601명, 정용 19,754명, 1품 19,882명 합계 48,237명이다. 1개 군현의 군액은 보승 · 정용 ·1품을 합쳐서 평균 150명 안팎이고, 많은 경우는 300∼400명 수준으로 특정 시점에 파악된 군액으로 생각된다.
주현군 중 보승 · 정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수도 개경의 경비였다. 주 · 현의 보승 · 정용과 6위(六衛)의 보승 · 정용을 별개의 존재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으나 대체로 주 · 현의 보승 · 정용이 6위의 보승 · 정용을 구성하는 것으로 본다. 즉 주 · 현의 보승 · 정용은 교대로 개경에 번상하여 수도의 경비를 담당하였다.
주 · 현의 보승 · 정용은 양계의 방수(防守)에도 동원되었다. 개경으로 번상하여 6위의 보승 · 정용을 구성하고 그 가운데 일부가 교대로 양계에 들어가 국경의 방수에 충당되었다. 주진입거군인(州鎭入居軍人)이라고도 불린 이들 방수군의 방수 기한은 1년을 단위로 하였고, 교대시기는 병졸은 2월, 군관은 8월이었다.
보승 · 정용의 또 다른 임무는 거주 주 · 현의 방위와 치안유지였다. 주 · 현의 관아 · 창고 · 성곽 등의 경비와 질서유지를 위한 순찰 등의 임무는 보승 · 정용의 일부가 교대로 주 · 현의 치소(治所)에 번상하여 수행하였다. 외적의 방어나 반란의 진압을 위해 동원되는 것 역시 보승 · 정용의 기능이었다. 특히 대규모 출정시에는 보승 · 정용만이 아니라 1·2·3품군도 포함한 대부분의 주현군이 동원되었다.
이 밖에도 보승 · 정용은 중앙이나 지방의 노역에도 동원되었다. 노역의 전담부대로서 1품군이 있었으나 보승 · 정용도 평시에는 축성 등 군사적인 공역(工役)에 많이 동원되었다. 또한 농한기에는 정기적으로 군사훈련을 하였다.
1품군은 보승 · 정용과 같이 중앙정부에 의해 군액이 파악되고 동원되는 부대였다. 2번으로 나누어 가을에 교대되었고 동원 기간은 1년이었다. 주로 공역을 위해 동원되었으므로 역부(役夫) 또는 정부(丁夫)라고도 불리었다.
2·3품군은 중앙정부의 파악이나 통제 밖에 있던 군대로서 중앙을 비롯한 거주 군 · 현 밖으로 동원되는 1품군과 달리 거주 군 · 현 내의 노역에 동원되는 부대였다. 촌류라는 의미가 촌을 단위로 배치되었다기 보다 거주 군 · 현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주현군의 지휘는 수령을 비롯한 별장(別將) 이하 교위(校尉)의 장교직을 겸한 향리들이 담당하였다. 주현군의 징발 대상은 농민층 가운데 군역을 감당할 신체적 조건은 물론 경제력 능력을 갖춘 상층 농민이 주 대상이었고, 향리층도 포함되었다.
주현군은 군역 수행에 필요한 일체의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였으므로 군역 수행의 대가로 군인전(軍人田)이 지급되었다. 따라서 군인에게는 군역 수행 기간 중에 한하여 군인전에 대한 조세가 면제되고 군호를 보조하는 양호(養戶)가 지급되었다.
군역은 군인전과 함께 자손에게 연립(連立)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결원이 있는 경우에는 주로 백정(白丁) 농민층을 대상으로 선군(選軍)하였다. 한편 노동부대인 1·2·3품군은 신체상태 · 경제력 · 연령 등의 조건에 의해 전투부대인 보승 · 정용에 충당되기 어려운 자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주현군 역시 경군과 마찬가지로 부모가 70세 이상이고 다른 형제가 없을 경우 군역에서 일시 면제되어 시양을 하다가 부모가 돌아가면 다시 충군(充軍)되었다.
주현군은 몽고와의 전쟁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는 대체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점차 붕괴되기 시작하여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동원이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 결과 대몽전쟁 후기가 되면 주현군의 존재는 기록에서 사라지고 대신 지방 별초(別抄, 別抄軍)라는 새로운 군사조직의 활동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장기간의 항전과정에서 주현군 조직이 결정적 손실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전쟁의 와중에서 군역담당층이 몰락하고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주현군 조직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