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은 국가가 국민의 신분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호주를 기준으로, 한 가에 속하는 사람의 신분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공문서이다. 국가권력이 역역과 부세를 부과·징수하기 위한 기초자료를 얻기 위해 실시한 호구조사 결과를 기록한 행정적 문서로 시작되었다. 신분제도의 확립과 더불어 고려·조선시대에는 신분 그 자체를 확인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현재는 호구 파악이 주민등록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호적제도는 가와 가 안에서의 개인의 신분관계를 증명하기 위한 제도로서만 운영되다가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호적은 가족관계등록부로 대체되었다.
호적은 고대로부터 작성되었다. 중앙집권제가 일찍부터 발달한 중국과 그 주변국에서 천자 혹은 왕은 지배질서의 정점에서 영역 내의 모든 토지와 인민을 왕권으로 상징되는 전제국가에 복속시켰으며, 백성은 왕의 땅을 받아 삶을 영위하는 대신에 그 은혜에 보답하여 왕에게 생산물을 바치거나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호적은 원래 이러한 왕토사상의 통치이념에 입각하여 작성되었다.
호적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서 그 제도의 목적과 함께 바뀌고 있다. 처음에는 호구조사에 관한 행정적 문서로서 발전하였다. 호구조사의 기본적 목적은 사람인 구(口)와 구로 구성된 호(戶)를 대상으로 하여 국가권력이 역역(力役)과 부세(賦稅)를 부과 · 징수하기 위한 기초자료를 얻는 것이었다.
동양에서는 국가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토지를 대상으로 조(租)를, 사람을 대상으로 용(庸)을, 그리고 호(戶)를 대상으로 조(調)를 각각 부과하여 징수하는 제도가 발달하여, 그것을 각각 전세(田稅) · 신역(身役) · 호공(戶貢)이라고 하였다.
국가권력이 필요로 하는 역역과 부세의 부과 · 징수를 뒷받침하는 기초자료를 얻기 위한 호구조사에 관한 제도로서 성립한 호적제도는 주(周)나라 때에 성립된 이래 사회경제적인 체제가 바뀜에 따라서 그 기능도 변화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상 한사군(漢四郡) 때부터 주나라와 같은 기능을 가지는 호적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신라시대부터는 호적제도가 호와 구를 파악하는 기능과 함께 사회적 신분을 확인하는 기능을 겸하게 되었다.
신분제도의 확립과 함께 고려 · 조선시대에는 역역과 부세의 부과 · 징수와 관계없이 신분 그 자체를 확인하는 것이 호적의 중요한 기능이 되었다. 또 호적에 가족관계를 기재하여 가족 내의 신분을 확인하는 기능도 갖게 되었다. 즉, 유교적 가족제도 및 재산상속제도가 발전함에 따라 가족 내의 신분의 확인이 필요하게 되어 호적이 그러한 기능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주거를 옮긴 사람의 호적상의 근거를 호적에 기재하여 사람을 토지에 묶어서 함부로 떠돌아다니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도 가지게 되었다. 대한제국기에 갑오경장(甲午更張)에 따라 봉건적인 신분제도가 폐지됨으로써 호적제도의 기능 중에서 신분을 확인하는 기능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통감부가 우리나라에 설치되면서 호적제도는 근본적인 개혁을 겪게 되어 호적은 거의 전적으로, 가(家)와 가 안에서의 개인의 신분관계를 증명하는 공증문서로 바뀌게 되었다.
오늘날은 호와 구를 조사하는 기능은 통계조사사업에 넘기고, 또 호와 구의 동태를 파악하는 기능은 주민등록제로 넘김으로써 호적제도는 가와 가 안에서의 개인의 신분관계를 증명하기 위한 제도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5년 헌법재판소의 호주제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민법상 호주제가 폐지되고 그로인해 호적법상 호적은 개인을 중심으로 편제된 새로운 ‘가족관계등록부’로 대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호적제도는 중국 전래의 제도로서, 신라시대부터 중국당(唐)의 제도를 수용 · 모방한 제도로 시작하여 오늘날과 같은 완비된 호적제도를 갖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호적제도와는 조금 달라서 국가가 징세, 징병, 부역 등의 시정(施政)에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국내인의 호구를 조사 등록한 호구장부(戶口帳簿)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는 호적대장인 장적(帳籍)이 있었다. 1933년에 일본의 사찰인 도다이지〔東大寺〕의 쇼소인〔正倉院〕에서 불경을 수리하던 중에 현재의 청주인 서원경(西原京) 및 그 부근 4개 촌의 장적이 발견되었다. 이 장적은 3년에 한 번씩 조사하는 것으로서, 촌의 호수(戶數), 인구수, 토지면적,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의 본수(本數) 및 호구, 우마의 감소 등이 기록되었다.
호는 인정(人丁)의 수에 따라 상상(上上) · 상중(上中) · 상하(上下) · 중상(中上) · 중중(中中) · 중하(中下) · 하상(下上) · 하중(下中) · 하하(下下)의 9등호제(九等戶制)를 이루었고, 인구는 연령을 기준으로 정(丁) · 조자(助子) · 추자(追子) · 소자(小子) · 제공(除公) · 노공(老公)의 6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중 호구조(戶口條)에 의하면, 호적은 귀족인 양반과 상민이 별도로 작성되게 되었다. 상민의 호적은 징세, 징병, 부역에 참고하기 위한 문서로서 주 · 현관(州縣官)이 매년 그 인구를 조사하여 호부(戶部)에 보고하였고, 이 호적에 의하여 상민의 남자는 16세가 되면 전정(田丁)으로서 국역(國役)에 종사하고 20세가 되면 군정(軍丁)으로서 군무에 복무하게 하였으며, 60세에 이르러서야 면역(免役)이 되었다.
양반의 호적은 세계(世系)를 위시하여 자녀, 사위, 조카, 아우 등 동거친족의 족파(族派), 소속 노비의 전래계통, 그 소생 노비의 이름, 연령 및 노처비부(奴妻婢夫)의 양천(良賤)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을 기재하였다.
조상의 기재방식에 따라 사조호구(四祖戶口)와 팔조(八祖)호구가 있었다. 이 호적은 3년마다 개편하는 동시에 2통을 작성하여 1통은 관에 보관하고 다른 1통은 각자에게 보관케 하였다. 그리고 양반의 호적은 상민의 호적과는 달리 일종의 특권적 신분증명서임과 동시에 면역증(免役證)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호적은 식년(式年)인 3년마다 개편하였는데, 개편할 때에는 각호(各戶)에서는 호구단자(戶口單子)라는 호구신고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호적제도가 완비된 때는 1428년(세종 10) 호구성급규정(戶口成給規定)과 호구식(戶口式)을 제정하면서이다.
호주와 호처의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를 기재하는 것을 “사조호구”, 사조의 사조까지를 기재하는 것을 “팔조호구”라고 하는데, 고려시대에는 가문을 과시하기 위해 팔조호구를 작성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이것이 너무 번거롭기 때문에 사조호구로 통일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다음의 사항을 기재하였다.
①호적작성 년월일, ②호(집)의 소재지, ③호주의 관직, 또는 신분 · 성명 · 연령(본관 · 부 · 조 · 증조의 관직, 또는 신분 · 성명 · 연령, 사망한 때에는 사망의 표시), 모의 성 · 본관 · 연령, 외조부의 관직 또는 신분 · 성명 · 연령, ④호주의 처의 성 · 연령 · 본관 · 부 · 조 · 증조의 관직, 신분 · 성명 · 연령, 모의 성 · 연령, 본관, 외조부의 관직 · 신분 · 성명 · 본관 · 연령, ⑤호주의 자녀, 기타 동거하는 친족의 호주와의 관계 · 관직 또는 신분 · 성명 · 연령(자녀는 남녀 불문하고 출생순위로 기재), ⑥가족들의 처의 성 · 연령 · 본관, ⑦동거하고 있는 사위의 관직 또는 신분 · 성명 · 연령 · 본관, ⑧소유 노비의 전래 계통 · 어미종의 명 · 출생순위, 노비의 명 · 연령, ⑨독립호인 노비의 호적에는 호주인 노비 상전의 성명 · 명 · 연령, 처인 비의 상전의 성명 · 연령, 소생 노비의 출생순위 · 성명 · 연령 등.
호적의 작성은 호주의 부처(夫妻)의 세계(世系)를 증명할 참고문서를 첨부하여 각 가의 호주로부터 이정장(里正長)에게 제출하고 이정장은 관하 각호의 호구단자를 수집, 서울에서는 이를 한성부윤(漢城府尹)에게 송부하고, 지방에서는 이를 관할 주군(州郡)의 수령(守令)에게 송부하였다. 한성부윤 및 주 · 군의 수령은 이에 의하여 관내 각호의 호적을 작성하여 호적장(戶籍帳)으로 비치하였다.
한성부는 호적장 2통을 작성하여 1부는 호조(戶曹)에 상납하고 1부는 부(府)에 비치하였으며 지방에서는 호구장(戶口帳) 3통을 작성하여 그중 1부는 호조에, 1부는 관찰사영(觀察使營)에 상납하고 다른 1부는 소관 지방관청(주 또는 군)에 비치하였다.
호적제도를 보완하기 위해 호패법(號牌法), 인보정장법(隣保正長法),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등을 시행하였다. 호패법은 16세 이상 남자의 신분증 명패인데, 1407년(태종 7)에는 실시하였고, 신분에 따라 호패의 재질을 달리하였으며, 성명, 신분, 연령, 주소 등을 새겨 관인을 날인하였다.
인보정장법은 10호 내외를 1인보로 하여 유력자를 정장으로 하여 인보기(隣保記)를 비치하여 주민의 동태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오가작통법은 5호를 1통으로, 5통을 1리로 하여 각각 통주(統主)와 이정(里正)을 두고, 면에는 권농관(勸農官), 한성부에는 관령(管領)을 두어 호구의 동태와 이동을 보고하게 한 제도이다.
호적사무 관장기관은 중앙에는 호조, 경중에는 한성부윤이 있고 지방에는 각 도에 관찰사, 각 주 · 군에는 수령이 있었으며 보조기관으로서는 각 리에 이정장이 있어 관하 이민(里民)들의 출생 · 사망 · 이거(移居) 사항 등을 파악하고 호적개편 시에 호구단자의 수집 및 그 상신 등의 사무를 취급하였다.
갑오경장 당시인 1896년 9월 1일 칙령 61호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을 공포하고 같은 해 9월 3일에는 내무령 8호로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을 공포함으로써 근대적인 호적제도를 갖기에 이르렀다.
호적에는 필요한 기재사항으로 호주의 연령, 본관, 직업 및 전거주지, 사조(四祖), 동거친속 이외의 원적(原籍)이 없는 무가(無家)의 기구(奇口), 고용자의 구수(口數), 가택의 유무 및 초가집, 기와집의 칸수(間數) 등을 기재하였다.
당시의 호주와 가족은 사실상의 호구를 말하는 것이었고 호적의 좌편(左片)은 호주가 소지하도록 하였다. 호적의 개정은 매년 1월 1회로 하였고 분호(分戶)에 의한 분적(分籍), 호주의 교체, 출생 · 사망 등에 의한 개적(改籍)은 20일 이내에 하도록 하였으며, 그 이외의 신분상의 변동사항에 대하여서는 호적에 기재하지 않았다.
「호구조사규칙」에서 ‘호’는 물리적 가옥이며, ‘호주’는 그 소유자이다. 즉 실제로 거주하는 ‘집’과 그 소유자를 신고의무자인 호주로 하여 호를 편제하고 인구 등을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예산의 부족, 국역부담의 증가 등에 대한 우려, 거주지 변동의 미반영 등으로 실패하였다. 이 제도는 전통적인 호구 내지 인구파악 방식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방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1909년(융희 3)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됨에 따라 「호구조사규칙」은 폐지되었다.
일제 통감부의 주도로 1909년(융희 3) 3월 법률 제8호「민적법」이 공포되어 4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 법의 목적은 “국민의 신분관계를 법률상으로 명확히 하는 동시에 전국의 호수(戶數)를 실수(實數)로 정확히 파악하여 시정(施政)상의 편의에 제공하려는 것”(1909년 훈령 「민적시행에 관하여 각 도 관찰사에게 발하는 내무대신 훈령」)이었다.
「민적법」은 호주를 중심으로 하여 그 친인척을 통합하여 ‘가(家)’를 구성하고 그들 사이의 친족관계를 민적에 기재하는 신분등록제도(身分登錄制度)이다. 그리고 전래의 정주지를 ‘본적(本籍)’으로 하였다. 민적에 기재해야 하는 사항은 “출생, 사망, 호주변경, 혼인, 이혼, 양자, 파양, 분가, 일가창립, 입가(入家), 폐가, 폐절가재흥, 부적(附籍), 이거(移居), 개명” 등 15개이며, 이에 대한 신고의무자를 명기하였다. 민적법은 헌병을 동원하여 강제로 조사하였다. 우리나라의 호적은 민적법 시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와 신분관계를 공증하는 문서가 되기에 이르렀다.
「민적법」시행 시에는 신고는 부윤(府尹) 또는 면장(面長)에게 하였고 호적부의 관장은 경찰서가 하였으나, 1915년 4월 1일「민적법」의 개정으로 호적은 완전히 부윤, 면장에게 이관되었고, 관통첩(官通牒, 1915.8.7 제240호)에 의하여 종전의 호구조사방식은 지양되고 모든 신분관계는 원칙적으로 신고에 의하도록 하였다.
1922년「조선민사령」제11조 친족상속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고, 이에 따라 12월 18일 조선총독부령 제154호로 「조선호적령」을 공포, 1923년 7월 1일부터 시행하였고, 같은 해 3월 조선총독부훈령 제15호의「조선호적령시행수속(朝鮮戶籍令施行手續)」에 의하여 세칙규정을 두었다.
따라서 민적법은 이「조선호적령」의 시행으로 인하여 폐지되었으나, 다만 동령(同令) 제129조에 의하여 동령 시행 전에 발생한 사항의 신고 또는 계출(屆出)에 관하여는 종전의 규정에 의한다고 규정하여,「조선호적령」시행 전에 발생한 사항의 신고 또는 계출에 관해서는 종전「민적법」의 규정에 의하도록 하였다. 조선호적령의 제정으로 신분관계를 공시하는 제도가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적법」과 「조선호적령」상의 호적제도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①호적사무의 감독관청이 도지사 및 군수에서 지방법원장 및 지청의 상석판사(上席判事)로 되었다. ②호적부의 보관방법 및 호적부의 멸실에 대비하여 조선호적령에서는 호적은 정부(正副) 2권을 두어 정본은 부청(府廳) 또는 면사무소에 비치하고 부본은 호적의 기재수속을 완료한 신고서 기타 수리한 서류와 함께 감독법원에 송부 · 보존하였다.
③호적에 대한 각종 신고의무자가 민적법에서는 일률적으로 호주이었으나 조선호적령에서는 신고사항 중 보고적 신고와 창설적 신고를 구별하여 후자에 대해서는 신고의무를 부과하지 않았고 각종 산고는 호주와 본인 및 가족 등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④신고의 수리 · 비수리의 처분에 대한 증명서의 청구에 대해 민적법에는 규정이 없어서 인정되지 않았으나, 조선호적령에서는 신고인은 이에 대한 증명서를 청구할 수 있었다. ⑤호적사무처리의 절차에서 민적법에는 세칙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통첩 · 회답 등으로 처리하였으나 조선호적령에서는 호적기재사항, 호적기재가 법률상 불가한 것, 그 기재에 착오 또는 유루(遺漏)가 있을 때의 직권정정, 신고서의 추완, 취적(就籍) 등 상세한 절차규정을 두었다.
1939년 11월 10일 칙령 제19호로「조선민사령 개정의 건」이 공포되어 다음 해인 1940년 2월 1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 개정령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1939년 12월 26일 부령 제220호로 「조선호적령」이 개정되어 1940년 2월 11일부터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시행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일본의 식민통치는 끝이 났으나 호적에 관한「조선호적령」은 그대로 계속 시행되었다. 다만 1946년 10월 23일에 미군정법령 제122호「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을 공포하여 같은 해 12월 24일부터 시행함으로써 1940년 2월 11일 시행된 창씨개명으로 성(姓) 대신 씨(氏)로 바뀌었던 씨 제도는 성 제도로 환원되었다.
1948년 4월 1일 미군정법령 제179호로 「호적의 임시조치에 관한 규정」을 공포 시행하게 되었는바, 이 규정은 1945년 8월 15일 당시 38선 이북에 본적을 가진 자로서 38선 이남지역에 거주한 자는 가본적지(假本籍地)를 정하여 취적(就籍)신고를 하는 가호적제도(假戶籍制度)이다. 이는 남북분단으로 인한 부득이한 법적조치이었다. 하지만 이 취적신고는 법원의 허가절차 없이 신고만으로 이루어졌으므로 후에 많은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제헌 헌법 부칙 제100조에 의하여 「조선호적령」과 그 부속법령이 계속 시행되었다. 1958년 「민법」의 제정(1960.1.1 시행)과 함께 「호적법」(1960.1.1 법률 535)과 그 부속법령이 제정되어 공포 시행되었다. 「호적법」부칙 제142조의 규정에 의하여 “「조선민사령」중 호적에 관한 규정,「조선호적령」, 호적임시조치에 관한 군정법령” 등은 폐지되었다.
호적은 가족의 구성과 편제원리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호적법 역시 이를 반영하며, 민법의 친족편은 일제강점기에 확립된 가족관습을 반영하여 제정되었기 때문에, 호적법은 조선호적령과 그 내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호적법에서는 개인이 아닌 호주를 중심으로 호적을 편제하였으며, 호주는 부계남계계승을 원칙으로 하였다.
「호적법」이 제정된 후 수차례에 걸쳐 보완 · 개정하여 시행되어 오다가 2005년 2월 3일 호주제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이후 2005년 3월 31일 법률 제7427호로 공포된 「민법 일부개정법률」에 따라 호주제 폐지, 성(姓)의 부성(父姓)주의 원칙의 수정, 친양자 입양제도, 성본(姓本) 변경제도 등이 반영되어 개인의 존엄성과 양성평등의 헌법이념을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민법의 개정에 따라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2007.5.17 법률 8435)이 제정 공포되어 2008년 1월 1일부터 시행됨에 따라 「호적법」은 폐지되었고, 종래의 호적제도 역시 모습을 달리하게 되었다.
2007년 5월 17일에 제정된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과 이전의 호적제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종전의 호적제도가 호주를 기본으로 한 것임에 비해 2007년 새로 제정된 제도는 부부를 기초로 하고 있는 점이다.
가족관계등록제도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호주제의 폐지, 개인별 가족관계등록부 작성, 본적의 폐지 및 등록기준지 개념 도입, 증명서 교부청구권자 및 교부사유의 제한, 다양한 목적별 증명서의 발급, 본적지 처리원칙의 폐지와 신고관서 직접처리 원칙의 시행, 혼인신고 등 당사자 불출석시 신고요건의 강화, 국적통보에 의한 가족관계등록부의 작성, 국적회복 허가시 종전 성과 본의 계속사용, 친양자제도의 시행, 혼인신고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는 제도의 신설, 성본 변경 제도의 신설 등이 기존의 호적제도와 달라졌다. 그렇지만 업무처리 체계 등 많은 부분에서 기존 호적제도를 유지함으로써 새로운 제도 시행에 따른 혼선을 최소화하였다.
특히, 가족관계등록부는 전산정보처리 조직에 의한 등록사무의 처리로 종전의 전산호적처럼 원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등록사항에 관한 전산정보자료를 개인별로 구분 · 작성한 전산상의 데이터를 말한다. 본인의 가족관계등록부에는 본인의 가족관계 등 등록사항(기본 신분정보사항과 신분변동사항)만을 기록할 뿐이며 나머지 관련자들에 대한 가족관계 등 등록사항은 가족들 간의 연결정보로 필요한 부분만을 추출하여 법규가 정하는 전산양식에 따라 증명서로 발급한다.
새로운 제도의 시행에 따른 가장 큰 변화는 가족구조의 법적 변화이다. 호적법에서는 호주와 가족(배우자, 직계존비속)으로 구성되는 가를 상정하고 가의 대표자인 호주를 중심으로 편제하였으나 새로운 제도에서는 개인적 신분편제를 상정하고 개인별 신분등록제를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호주 · 남성 중심의 신분편제에서 개인중심 및 남녀평등의 신분등록제로 이행하여 헌법이 규정하는 양성평등과 개인의 존엄 등의 이념을 달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