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는 무제(武帝) 때 동방점령을 목적으로 요동지방 진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한나라의 무력침공은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위만조선(衛滿朝鮮)과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서기전 108년에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굴복시키고 점령지역의 통치를 위해 4개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분할하였다. 이것이 한사군이다.
이 4군은 명칭은 물론, 지역·치폐경위·소멸 등에 이르기까지 각각 다른 변천과정을 겪었다. 4군은 전후 두 차례에 걸쳐 크게 변화되고 있다. 서기전 82년에는 진번군을 낙랑군에 합하고 임둔군은 현도군에 폐합되었다.
서기전 75년에는 토착세력의 저항으로 현도군의 치소(治所)가 고구려현(高句麗縣)에서 혼하(渾河) 상류의 흥경(興京)·노성(老城)지방으로 옮겨지면서, 전에 현도군에 합쳤던 임둔군의 옛땅은 낙랑군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현도군의 처음 영토는 토착민에게 돌아갔으며 통치방식도 자치에 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처음에 설치된 4군 중 진번과 임둔 2군은 설치된 지 25년 만에 소멸되었고, 현도군도 20여 년만에 본래의 지역이 토착세력에게 점령되어 한사군은 불과 30여 년만에 낙랑군만을 남기고 소멸되는 변화과정을 겪게 되었다.
그 뒤, 낙랑군은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멸망하면서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이와 같이 한나라의 4군이 동시에 존속한 기간은 25년여에 불과하며 그 이후로는 낙랑군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그 역사적인 변천상황이 각각 다른 4군이 한사군이라고 하는 역사술어로 사용된 것은 일제의 관학사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조선을 식민지로 영구화하기 위해 조선의 역사에서 타율성을 강조하였다. 그 근거가 되는 역사사실의 하나가 바로 한사군이었다.
이들의 논리에 의하면, 조선의 역사는 자율적인 역사가 아니라, 외부의 침입과 이에 따른 영향으로 진행되는 타율적인 역사이며, 따라서 선진문물을 보유한 국가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나라의 식민지로 설치된 한사군의 존재는 타율성을 입증하는 좋은 근거가 되었다.
심지어 ≪조선사의 길잡이 朝鮮史の栞≫라고 하는 개설서에서는 조선사의 시작을 한사군부터라고 하여, 마치 우리 역사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사군은 일제가 우리 역사에서 타율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강조한 역사술어임을 알게 된다.
광복 후, 일제에 의해 왜곡, 날조된 한국사의 실체를 찾기 위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한사군문제도 재조명되었다. 그 결과, 한사군은 낙랑군을 제외하면 존속기간이 불과 25년 정도에 이르는 짧은 기간이었으며, 가장 늦게 멸망한 낙랑군도 후기에는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좁은 지역에서 이름만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더구나 한나라가 멸망(220)한 뒤의 시기는 한나라와 전혀 무관한 지역이다. 따라서 낙랑군의 성격은 통치기구라기보다는 중국대륙의 무역·통신업무 등을 수행하는 상업적인 기능이 강한 조계지(租界地)와 비슷한 기관임도 밝혀졌다. 낙랑계 고분이 평양 근처에서만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고고학적 보고도 그와 같은 증거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같이 한사군은 일제에 의해 그 실체보다도 확대 해석되어 지금까지도 한국고대사의 인식을 그르치게 하는데 영향을 끼쳐왔고, 광복 후에야 비로소 그 바른 모습이 밝혀졌다. 한사군은 우리 역사에서 시대구분상의 어떤 중요한 기점이 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역사술어로서도 타당성이 결여된 비과학적인 용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