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은 태조 왕건이 건설한 고려왕조의 수도이다. 919년 왕건이 송악현과 개성현 일부를 통합해 개주로 칭하고 이곳으로 천도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이 탄생했다. 강화도 천도기를 제외하고는 436년 8개월 동안 고려왕조의 수도로서 기능했다. 성종 때 개주를 개성부로 개칭하였고 조선이 건국과 더불어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개성이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에도 송악산 남쪽에 있는 궁성과 그 외곽의 황성, 도성 안팎의 별궁, 내성·외성으로 이루어진 성곽, 불교사원 및 유교 시설인 원구·태묘·사직·국자감·문묘 등 문화적 가치가 높은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개경(開京)은 송도(松都) 혹은 송경(松京)이라고도 한다. 태조 왕건이 도읍한 이래 37년 10개월의 강도(江都) 시기를 제외하면 436년 8개월 동안 고려왕조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거란(요), 몽골, 홍건적에게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고려인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려는 개경과 서경(평양)의 양경제, 개경 · 서경 · 동경(경주)의 삼경제, 개경 · 서경 · 동경 · 남경(한양)의 사경제를 운영했다. 이 중의 어느 경우에도 몽골과 항쟁한 강화도 시기를 제외하면 개경은 수도로서 경성(京城), 경도(京都), 경사(京師), 상경(上京), 상도(上都)라 불렸다.
광종이 개경을 황도(皇都)라 칭하면서 황도로도 불렸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해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개성(開城)’이라 불렸다.
개경의 모체는 태조 왕건의 고향인 송악현(송악군)이었다. 신라말 혼란기에 궁예가 용건과 왕건 부자의 귀부를 받고 이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고려’를 건국했다. 하지만 궁예는 국호를 ‘마진’이라 바꾸어 철원으로 돌아가더니 국호를 ‘태봉’이라 했다.
정변을 일으켜 즉위한 왕건은 국호 ‘고려’를 회복하고 919년(태조 2)에 송악현과 개성현 일부를 통합해 ‘개주(開州)'라 하여 이곳으로 천도했다. 이리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이 탄생했다.
개주는 성종 때 개성부(開城府)로 개칭되어 왕경과 경기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현종 때 왕경은 중앙정부 직속이 되고, 경기는 개성현령과 장단현령이 관장했다.
문종 때 개성부가 설치되어 경기를 담당했다. 원간섭기인 1308년(충렬왕 34)에는 개성부가 도성 안을, 개성현이 성외 즉 경기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를 바라볼 때 ‘개경’과 ‘개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1.궁궐
개경은 국왕이 순행이나 피난이 아니면 상주했기 때문에 수도였고, 왕의 거주처로 궁궐이 건립되었다. 고려를 대표하는 대내(대궐) 즉 본궐은 송악산 남쪽 기슭에 건립되었는데, 궁성(宮城)과 그 바깥의 황성(皇城)으로 구성되었다.
궁성은 초기에는 정전인 천덕전[天德殿, 건덕전(乾德殿)]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현종 때 거란군에 의해 불탄 것을 재건하면서 새로운 정전인 회경전[會慶殿, 선경전(宣慶殿)]이 건립되면서 회경전과 건덕전[대관전(大觀殿)], 두 개의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주요 기능을 들면, 회경전(선경전)은 대장경도량․인양도량 개최와 송 사절 영접, 건덕전(대관전)은 시조(視朝), 선정전[宣政殿, 선인전(宣仁殿)]은 시사(視事), 중광전[重光殿, 강안전(康安殿)]은 연등회, 신봉문루[神鳳門樓, 의봉문루(儀鳳門樓)]와 구정(毬庭)은 팔관회, 경령전(景靈殿)은 태조와 사조(四祖) 봉안의 공간이었다.
궁성에는 사나내원(舍那內院), 내제석원, 내천왕사 등의 내불당이 운영되었다. 황성 안에는 동지(東池), 법왕사, 삼성(三省), 추밀원, 어사대 등이 존재했다. 궁성의 정문은 남문인 승평문(昇平門)이었고, 황성의 정문은 동문인 광화문(廣化門)이었으며, 광화문 밖에 6부가 자리했다.
개경 일대의 별궁 내지 이궁(離宮)으로는 수창궁(壽昌宮), 연경궁(延慶宮), 대명궁(大明宮), 장원정(長源亭) 등이 유명했다. 나들이를 좋아한 의종은 도성 안팎에 다양한 별궁을 건립해 유희를 즐기다가 무신정변을 초래했다.
고려시대는 후비(后妃)와 왕자, 공주도 궁을 소유했다. 몽골과의 전쟁을 겪은 후의 고려말기에는 황성이 기능을 상실하고 본궐이 강안전 중심으로 복구되어 주로 의례용으로 사용되었고 수녕궁, 연경궁, 수창궁 등 이궁이 왕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개경의 성곽을 살펴보면, 태조 왕건은 송악산과 그 남쪽을 감싸는 발어참성(勃禦槧城)으로 후삼국 통일을 달성했다. 대내는 발어참성의 하단부에 조영되었다. 현종 때 거란군의 침략으로 개경이 불타면서 개경 방어를 보완하기 위해 외성인 나성(羅城)을 건설했고 이로써 발어참성은 내성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외성을 유지하기 어려워 고려말~조선초에 외성과 발어참성 사이에 내성을 건설했다. 현종 때 개경 나성의 건설은 새로운 도성의 탄생을 의미했다. 이 나성은 23㎞로 우리나라 도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그 문의 개수는 무려 25개로 우리나라 도성은 물론 중국 도성보다도 많았는데 편리와 소통을 추구한 결과로 여겨진다, 그 중에서 가장 화려한 것은 정서문으로서 예성강의 벽란도와 도로가 연결되고 송 사절이 내왕하는 선의문(宣義門)이었다.
개경성의 도심은 북남대로와 서동대로가 만나는 십자가(十字街)에 형성되었다. 개경성에서 대내는 북서쪽에 위치해 황성의 정문을 중국처럼 남쪽 주작문에 두었다면 도심이 서쪽으로 치우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는 황성의 정문을 동쪽 광화문에 두고 이 문에서 남쪽으로 남대가(南大街)를 달리게 함으로써 도심이 도성의 중앙에 형성될 수 있었다. 광화문과 십자가 사이의 남대가에는 시전(市廛)이 조성되었고, 도성 중앙을 가로지르는 오천(烏川)을 따라 각종 시(市)가 번성했다.
도성 안에는 외교 사절이 머무는 객관들이 자리했는데 특히 송 사절이 머무는 순천관(順天館)은 대명궁을 개조한 것으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했다. 도성 안에는 또한 송상 등 외국상인들이 머무는 숙소가 운영되었고, 개경의 관문인 벽란도는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번창했다.
개경의 행정구역은 동부 · 서부 · 남부 · 북부 · 중부의 5부(部), 안정방 · 덕산방 · 법왕방 · 흥국방 · 앵계방 등의 35방(坊), 그리고 344개의 리(里)로 이루어졌다. 개경의 인구는 최우정권이 강화로 천도할 때 10만 호(戶)였던 것으로 보아 대략 30~5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고려는 불교중심 국가여서 개경성 안팎에 수많은 불교사원이 건립되었으니 유교 지상주의 국가 조선의 수도 한양과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태조 왕건 때 법왕사(法王寺), 왕륜사, 내제석원, 사나내원, 대선원(보제사), 개국사 등이, 광종 때 봉은사(奉恩寺), 귀법사 등이, 목종 때 진관사, 숭교사 등이, 현종 때 유가종(법상종) 현화사(玄化寺) 등이 건립되었다.
문종은 엄청난 규모의 화엄 흥왕사(興王寺)를 건립했다. 숙종 때 천태종의 중심도량인 국청사(國淸寺)가 창건되었고, 예종 때 안화선원이 안화사(安和寺)로 확대 중창되었다. 황성 안에 자리한 법왕사는 팔관회 때 왕이 행차해 분향한 곳이었고, 봉은사는 태조 진전(眞殿)이 위치해 왕이 연등회와 태조 기일 때 이곳에 행차해 분향했다.
유교적인 시설로 개경에 성종 때 원구(圓丘)[환구(圜丘)], 태묘(太廟)[대묘(大廟)], 사직(社稷), 국자감, 문묘(文廟) 등이 건립되었다. 태묘는 중국과 달리 도성 동벽의 바깥에 자리했는데, 여기에는 종산인 오관산과 주산인 송악산의 접점을 고려한 음양풍수설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교적 시설로는 태조 때 구요당(九曜堂)이, 예종 때 복원궁(福源宮)이 건립되었는데, 특히 복원궁의 조영은 도교 교단의 탄생을 가져왔다. 성균관( 국자감의 개칭)은 공민왕 때 숭문관(崇文館, 순천관의 개편) 자리로 옮겨 재건되었다.
개경 지역은 북한에서 개성직할시로 편제되어 있다. 남쪽 외곽 일대에 개성공단이 조성되었고, 대궐의 서쪽 구역을 남한과 북한이 공동으로 발굴을 진행해 왔다.
개경은 고려왕조의 수도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개성 일대에 많은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어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또한 개성 지역은 6 · 25 전쟁 이전에는 남한에 속했다가 그 후에는 북한에 속하는 특성을 지니면서, 남한과 북한이 접하는 곳이어서 남북한 교류의 가교로 작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