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궁은 고려 전기 제16대 예종 연간에 개경의 북쪽 태화문 안에 건립된 도관이다. 임춘의 「일재기」에 건립의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도교에 심취했던 이중약이 송나라에 가서 도교를 배우고 귀국하였다. 이중약은 북쪽 태화문 안에 복원궁을 세우고, 그곳에서 도교의 이치를 강론하였다. 서긍의 『고려도경』에 복원궁의 모습이 서술되어 있다. 전방에는 ‘부석지문’, 차방에는 ‘복원지관’이라 쓰여 있다. 전각 안에 삼청상(三淸像)이 그려져 있다. 재궁에 도사 10여 명이 거처하며 도교 의식을 집행하였다. 조선 태조 즉위년(1392)에 복원궁이 혁파되었다.
건립 연대는 대관(大觀)과 정화(政和)의 두 가지 설이 제기되어 있으나 정설은 없다. 1120년(예종 15) 6월에 복원궁에서의 친초(親醮) 기록이 『고려사』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에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립의 경위는 고려 후기의 문인 임춘(林椿)의 「일재기(逸齋記)」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재기」에는 숙종 · 예종조의 인물인 이중약(李仲若)을 칭송하는 글로서 예종이 이중약의 건의에 따라 복원궁을 건립한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이중약은 어려서부터 도교에 심취하여 수도를 계속하였고, 의술에도 밝아서 숙종의 임종 무렵에 병을 고치기 위해 송도로 불려갔으나 도착 전에 숙종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예종의 만류로 궁중에 머문 그는 예종이 도교에 심취하는 데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 뒤 휘종 치하의 송나라에 가서 도교를 배우고 귀국하여 도관 설치를 상소, 복원궁을 세우고 거기에서 도교의 이치를 강론하였는데, 은하수의 뭇별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한다.
복원궁의 모습은 1123년(인종 1)에 북송 사신의 수행원으로 따라왔던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복원궁은 송도의 북쪽 태화문(太和門) 안에 있으며 정면의 전방(前榜)에는 ‘부석지문(敷錫之門)’, 차방(次榜)에는 ‘복원지관(福源之觀)’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전각 안에는 삼청상(三淸像)이 그려져 있고 그 중 혼원황제(混元皇帝), 즉 노자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모두 감색(紺色)으로 되어 있어 송휘종이 그린 노자의 상과 일치했다고 한다. 복원궁에는 재궁(齋宮)이 있어 도사 10여명이 낮에 거처하여 여러 가지 도교의 제례의식을 집행하고, 저녁에는 사실(私室)로 돌아가곤 하였다.
도사에 대해서는 『송사(宋史)』 고려전과 서긍의 『고려도경』에 기록이 나타나는데, 『송사』에는 대관 연간에 도관을 세우고 우류(羽流) 10여 인을 보내 주었다고 하였다. 『고려도경』에는 대관 경인년(1110)에 우류 2인을 고려에 보내 주었고 예종의 도교신앙이 독실하여 정화 연간에 복원관을 세워 도사 10여 인을 두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중국측의 기록에 의하면 복원궁의 창건 동기는 예종의 독실한 도교신앙에서 비롯되었고, 도사를 훈련시켜 복원궁의 운영을 준비시킨 것은 송휘종이 보낸 중국 도사들인 셈이다.
그런데 고려의 도사들은 속인들과 다른 복색도 하지 않았고 계율도 엄격히 지키지 않아 지탄을 받기도 하였는데, 도사와 속인 간의 구별이 처음부터 애매모호했던 점과 한국에서 도교 교단이 성립되지 못한 것은 서로 관계가 있다.
복원궁에서 행해진 재초(齋醮)는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태일(太一) · 수성(壽星) · 탄일초(誕日醮) 등에 불과하지만,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재초가 행해졌으리라 생각된다.
제례의식의 진행은 도사들이 담당했으나 축문에 해당되는 재사(齋詞)나 청사(靑詞)는 문신들에 의해 작성되었는데, 정포(鄭誧)의 「복원궁행탄일초례문(福源宮行誕日醮禮文)」이 남아 전해 오고 있다.
태일신앙이 특히 강조되었는데 복원궁의 천황당은 태일의 신위를 안치하여 전적으로 그 초례만을 거행했던 곳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태일은 별 이름으로서 그것이 신격화되어 풍우 · 한발 · 기근 · 질병 등을 다스린다고 여겨 왔다. 태일을 받듬으로써 재앙을 없애고 수복강녕을 가져올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조선 태조 즉위년(1392) 11월에 소격전(昭格殿) 한 군데만 남기고 구요당(九曜堂) · 신격전(神格殿) · 대청관(大淸觀) 등의 초소(醮所)를 폐지할 때 복원궁도 같이 혁파되었다. 그러나 복원궁 천황당에 안치되었던 태일의 신위는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후 새 도읍으로 옮겨져 태일이배별초례(太一移排別醮禮)가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