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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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
개념
도교에서 도사들이 거주하며 의례를 집전하는 도교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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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도교에서 도사들이 거주하며 의례를 집전하는 도교건축물.
내용

한무제(漢武帝) 때인 기원전 109년 최초로 건립되었다. 도관의 성립은 불교의 유입에 영향받아 형성되었기 때문에, 형식 역시 불교의 사찰과 대동소이하다. 모시는 신은 처음에는 노자(老子)나 일월성신(日月星辰)과 같은 자연신이었으나, 후대에 와서는 제1등급의 우주 창조신인 원시천존(元始天尊)에서부터 온갖 귀신의 우두머리인 제7등급 풍도북음대제(酆都北陰大帝)까지의 7등급 위패를 모두 모셨다.

지역에 따라서는 두신(杜神)과 토지신(土地神) 등을 모시는 곳도 있었다. 모시는 신에게 재초(齋醮)를 올리는 것이 주요 업무 중 하나인데 양재기복(禳災祈福)이 그 목적이다. 재초를 행할 때 도관의 도사들은 예복을 갖추고 경문(經文)을 외워 신을 불러 내는데, 의식에 쓰이는 법기(法器)에는 홀(笏)·칠성검(七星劍)·사도(師刀)·영패(令牌)·제종(帝鐘) 등이 있다.

재초 외에 많은 행사와 업무가 이루어졌는데, 피액(避厄) 수단인 부(符)의 발행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에서 종교조직체로서의 도교 교단이 형성된 것은 태평도(太平道)·오두미도(五斗米道)·천사도(天師道)·모산도(茅山道) 등이 생겨난 후한 때이며, 북위의 구겸지(寇謙之)는 도교를 국가 종교의 지위로 올려 놓았다. 이러한 발전에 힘입어 당나라 때는 중국 전역에 1,687개의 도관이 세워져 과의적 도교(科儀的道敎)가 극성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624년(영류왕 7) 이미 도교가 수입되었고, 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당나라로 유학간 학인들 가운데 도교를 배워 와 도관에서의 재초가 낯설지 않게 되었는데, 최치원(崔致遠)은 적지않은 재사(齋詞)를 지어 현재 ≪계원필경집 桂苑筆耕集≫에 남겨 놓고 있다. 고려시대에서는 과의적인 도교가 국가차원에서 받아 들여져 각종의 재초가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초기에는 일정한 도관이 없이 궁전의 뜰 등에 단(壇)을 쌓아 초제를 지내다가 예종이 이중약(李仲若)의 건의에 따라 복원궁(福源宮)을 건립하여 국가의 재초를 집행하였다. 건립연대는 ≪고려사≫ 1120년(예종 15)조에 친초(親醮:왕이 초제에 참여함) 기록이 나오므로 그 이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위치는 왕도의 북쪽인 태화문(太和門) 안이었고, 복원궁 안에는 삼청상(三淸像)이 모셔져 있었으며, 도사 10여 인이 일을 맡아 보고 있었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도사의 복장은 송나라의 것과 같다고 하나 서긍(徐兢)의 ≪고려도경 高麗圖經≫에는 일반인들의 복장과 특별한 차이가 없고, 다만 소매가 약간 넓을 뿐이라고 적혀 있다.

복원궁 이외 고려시대는 신격전(神格殿)·정사색(淨事色)·소전색(燒錢色)·대청관(大淸觀)·태일전(太一殿)·구요당(九曜堂)·청계배성소(淸溪拜星所)·소격전(昭格殿) 등의 초소(醮所)가 있었다. 그 가운데 구요당은 1253년(고종 40)에 최항(崔沆)이 궁궐 서쪽에 지은 것이며, 궁궐의 북쪽 기슭에는 소격전이 있었다.

조선시대는 1392년(태조 1) 예조의 상소에 따라 소격전을 제외한 다른 도관은 혁파하였고, 1394년 송도에서 한양으로 소격전을 옮겼으며, 1396년 좌우도(左右道) 장정 200인을 징발하여 소격전을 세웠다. 1417년(태종 17) 소격전의 확장 건의가 있어 개축하였고, 1466년(세조 12) 소격서(昭格署)로 개칭하여 지위를 격하시켰다.

≪증보문헌비고≫ 및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소격전의 위치는 서울의 삼청동이었으며, 그 산하에는 삼청전(三淸殿)·태일전(太一殿)·직수전(直宿殿)·십일요전(十一曜殿)이 있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慵齋叢話≫에 따르면, 삼청전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옥황상제(玉皇上帝) 등의 남신(男神)을, 태일전에는 여신인 칠성(七星)의 제수(諸宿)를, 그리고 내외제단(內外諸壇)에는 사해용왕신, 명부(冥府)의 시왕(十王), 수부(水府)의 여러 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다. 이들 신들의 위계는 삼청전의 제군(諸君)이 상이며, 태일전의 칠성천제는 중, 그 밖의 제신은 하로 등급 지어져 있었다.

특히, 태일성(太一星) 숭배는 태종 때 도교국가의 건설에 힘을 쏟은 김첨(金瞻)의 상소문에 잘 나타나 있다. 태일전은 1398년에 소격전으로 병합되었으나, 1472년(성종 8) 경상도 의성의 동빙산(東氷山)에 다시 건립되었고, 뒤에는 태일성의 방위이동에 따라 태안(泰安)의 백화산(白華山)으로 옮겨졌다.

소격서는 이조의 관할이었다가 나중에는 관상감(觀象監)에 이관되었으며, 도사의 공과(功果) 및 도첩(度帖) 등은 예조 관할이었다. 각 도관의 도사인 도류(道流)는 15인 정도였으나 시대에 따라 변동이 심하였고, 제조(提調)는 통상 도승지가 겸임하였다. ≪용재총화≫에는 제사절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부분이 있다.

“헌관(獻官)과 서원(署員)은 모두 흰 옷과 검은 두건 차림으로 재를 하고, 관(冠)과 홀 그리고 예복 차림으로 제사를 집행한다. 제사에는 여러 가지 과일과 떡·다탕(茶湯)·술 등을 차려 놓고 분향 백배한다. 도류는 머리에 소요관(逍遙冠)을 쓰고 무늬가 번쩍이는 검은 옷을 입고 경(磬)을 24번 울린 뒤에 두 명의 도류가 도경을 낭송하고 푸른색 종이에 축문을 써서 태운다.”

이 밖에 자수궁(慈壽宮)을 두어 여자 도사인 여관(女冠)을 거처하게 하였다. 소격서는 연산군과 중종 양대에 걸쳐 혁파문제를 둘러싸고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특히 중종 때는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림파가 강력하게 혁파를 주장하여 왕실과 대립하게 되었다. 그래서 1518년(중종 13)에 결국 혁파되었고, 충청도에 있던 태일전도 없애 버렸다.

그러나 기묘사화 이후 사림파가 대거 제거되면서 중종은 모후(母后)의 간청이라 하여 소격서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인 선조 때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상과 같이 우리 나라 도교행사의 중추적 구실을 했던 도관은 왕실을 중심으로 한 과의적인 것이 주류였다. 그리고 도교의 도관은 불교의 도량(道場)과 혼합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있는데, 서경의 팔성당(八聖堂)·칠성각(七星閣) 등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서울의 동문과 남문 밖에 있었던 관왕묘 및 각 지방의 촌락에 산재하는 서낭당은 민간신앙과 도교와의 연결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게 하여, 도관과 서로 다른 발전과정을 비교 가능하게 하고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
『용재총화(慵齋叢話)』(성현)
『오주연문장전산고』(이규경)
『조선도교사』(이능화 저, 이종은 역, 보성문화사, 1977)
『한국의 도교사상』(차주환, 동화출판공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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