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 ()

삼성훈경 / 각세진경
삼성훈경 / 각세진경
도교
개념
신선사상을 기반으로 노장사상 · 유교 · 불교와 여러 신앙 요소들을 받아 들여 형성된 종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도교는 신선사상을 기반으로 노장사상·유교·불교와 여러 신앙 요소들을 받아들여 형성된 종교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부터 산악신앙과 관련된 신선신앙, 수련을 통한 불로장생 등 초인적인 힘을 얻으려는 방술이 존재했다. 이 신선방술에 중국 전한 말기에 대두한 황로신앙이 더해지고, 불교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인 교리와 체계를 갖추면서 도교가 탄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도교가 전래된 이후 우리 고유의 신선사상과 중국의 수련적 도교가 융합하면서 발전해 왔다. 양생, 의학, 삼재 예방, 입택 등 생활 방면에서 도교의 방법론을 활용했다.

정의
신선사상을 기반으로 노장사상 · 유교 · 불교와 여러 신앙 요소들을 받아 들여 형성된 종교.
도교의 기원과 그 특색

신선방술과 도교

기원전 3세기 무렵 중국에서는 신선설이 생겨났다. 이 신선설은 중국 고대에 있었던 산악신앙(山岳信仰)과 깊은 관계가 있다. 여기에 중국 종교의 원초적 형태인 무술(巫術) · 자연숭배 등이 혼합되어,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술(方術)이 생겨났다. 이 방술은 전국시대에 이미 성립되어 민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방술을 행사하는 사람을 방사(方士)라고 하는데, 방사가 제왕과 밀접하게 된 것은 진시황(秦始皇) 때부터였고, 한무제(漢武渧) 때에는 제왕 측근에서 거의 떠나지 않을 정도였으므로 방술은 상층사회에 굳게 뿌리 내리게 되었다. 한편, 신선설이나 방술은 호소할 곳 없는 일반 백성들의 마음까지 사로잡기에 이르러 종교적인 힘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변천하였다.

전한 말부터 전설의 임금인 황제(黃帝)와 『도덕경』의 저자로 전해지는 노자(老子)가 초인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신선으로 꼽혀 황로신앙(黃老信仰)이 대두하였다. 방사들의 조작적인 선전과 참위설(讖緯說)의 유행이 황로신앙을 가열시켰다. 이러한 황로신앙을 가미시킨 신선방술의 내용이 조정, 확대되고 신흥종교였던 불교의 영향을 받아 도교로 개괄되는 한 종교로 형태를 갖추어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신선사상은 중국의 그것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도교와 도가사상

도교가 종교의 형태로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莊子)』 · 『열자(列子)』 등에 드러나 있는 도가사상은 존재하고 있었다. 동서고금에 도교와 도가사상을 혼동하는 예가 많다. 도교와 도가사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도교는 어디까지나 종교이므로 근본적으로는 도가사상과 뚜렷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도교는 본래 피안(彼岸)의 관념이 의외로 희박하고, 오히려 현세의 길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이론을 보강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고,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편으로 도가의 사상이나 그 논리를 받아 들이게 되었으므로 도교와 도가사상은 그 관계가 밀접해졌다. 도교는 마치 큰 바다가 작고 큰 물줄기들을 두루 받아 들이는 것같이, 온갖 종교 · 사상 · 풍속 등을 자체에 편리하게 흡수, 조절하는 특이한 성질을 지니고 변천해 왔다.

도가사상은 도교가 흡수, 조절한 주요한 사상의 하나이지, 본래부터 도교가 곧 도가사상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도가사상은 도교가 그 사상과 논리를 흡수한 이후에도 사상 · 문학 · 예술 등 각 방면에 작용하면서 독자적으로 전개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도가사상은 도교라는 종교와는 엄연히 구별되어서 역대 지식인들에 의하여 연구, 수용되어 한국사상 형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도교의 정착과 그 특색

도교는 4세기 이후 비로소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모방하고 불법(佛法)의 전개방식 등을 받아 들여, 교리의 체계화와 종교체제의 정비를 꾀하였다. 도교는 본래 자연발생적인 종교였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질 경우, 교조(敎祖)라든가 개산조(開山祖)라든가 하는 것을 밝혀낼 수는 없다. 노자를 교조로 내세우기도 하나 그것 역시 종교의 체제를 갖추게 하려는 의식이 생겨난 뒤의 일이다.

도교라는 종교의 성립과정과 그것이 목적하는 바를 요약해 보면, 도교는 고대의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신선설을 중심에 두고, 거기에다 도가 · 역리 · 음양 · 오행 · 참위 · 의술 · 점성 등의 법술과 무술적인 신앙을 보태고, 그것을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본받아 뭉뚱그린 종교로, 불로장생을 주요 목적으로 삼고 현세의 길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도교는 유교와 불교는 물론 다른 신앙까지 큰 마찰 없이 받아 들여서 포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도교라는 명목으로 포괄되는 신앙이나 행사의 내용이 매우 복잡해졌다. 도교는 신선설과 연결되어 불로장생을 이룩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됨에 따라 건강관리를 중시하여, 심리적으로는 사과신적 신앙(司過神的信仰)과 주술적인 방법이 도입되었고, 물리적으로는 호흡조절[調息], 곡식 먹지 않기[辟穀], 관절의 조절[導引], 남녀 방사의 조화[房中] 등의 방법이 채택되었다.

여기서 질병치료에서 불로장생까지 연결되는 도교 의학의 성립을 보게 되는데, 그 극치가 금단(金丹)이다. 그러나 금단은 현실적으로는 생명을 잃게 하는 독극물일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러한 위험을 극복하기 위하여 금단의 연조(煉造)를 연금술 같은 물리화학적인 방술에서 끌어 내면서 수련적인 단학(丹學)으로 전개하여, 도법을 닦는 의의와 결합시키는 데로 기울어졌다. 이렇게 하여 도교의 금단도(金丹道)는 연금술적인 외단(外丹)과 수련적인 내단(內丹)으로 크게 나누어졌고, 결국은 내 · 외단의 통섭(統攝)이라는 방향으로 이론체계를 정립시켰다.

비승(飛升) 은화(隱化) 및 시해(尸解)

선단을 먹거나 수련을 통해 공행(功行)을 쌓아 득도하거나 하여 신선이 되는 계제도 여러 가지로 다루어졌다.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것은 비승(飛升)이다. 비승은 신선이 되어 날아서 천상 선계로 올라가는 것으로 그 실례가 몇 가지 전해진다.

환 진인(桓眞人)의 경우 도교의 대인물인 도홍경(陶弘景, 456∼536)의 등외(等外) 제자로 있으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공행을 쌓아 그의 스승인 도홍경을 제쳐 놓고 선계 천존(天尊)의 부름을 받아 동자(童子)가 이끄는 선가(仙駕)와 의장(儀仗)의 영접을 받고 동자가 주는 선단을 마시고 선가(仙駕)에 올라 타고 선계로 날아 올라 갔다.

당나라 말기의 신라 유당 학생인 김가기(金可記)는 내단 수련에 성공하고 공행이 차서 미리 정해진 날짜에 당나라의 장안 종남산(終南山)에서 선계의 의장에 옹위되어 선단의 복용이라는 절차를 거치는 일 없이 백주에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상 선계로 곧장 날아 올라 갔다. 이러한 비승(飛升)의 예는 이 밖에도 몇 가지 전해진다.

은화는 비승같이 유별나게 선화(仙化)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길로 신선이 되는 것이다. 다만 비승의 경우같이 죽음의 형식을 전연 취하지 않고 곧장 신선이 되어 선계로 날아 올라가는 사례는 그리 흔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그 밖에는 신선이 되는 일이 없다고 해버리기에는 아쉬움이 없지 않으므로 죽는 형식만 취하고 실제로는 죽지 않고 신선이 되는 길을 터놓았다.

시해(尸解)가 그것이다. 시해에는 금목수화토 오행에 걸친 각기 다른 방법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례로 검시해(劍尸解)는, 평소 지니고 다니던 검을 임종하는 자리에 세워 놓고 임종을 하면 사람은 신선이 되어 선계로 올라 가고 지켜 보는 가족에게는 그 검이 시신으로 보여 그것을 매장한다는 순서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오행의 금 시해(金尸解)에 속한다고 하겠다.

천계(天界) 삼십육천(三十六天)과 동천복지(洞天福地)

도교는 신선설을 기조로 하고 있으므로 불로장생과 연결되는 선단, 불로초, 신비한 의약, 각 계층의 신선, 초능력이 따르는 각종 도술, 천상과 지상의 허다한 선계 등등 환상적인 경지를 크게 개척해 놓았다. 건강하게 장수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공통된 욕구이므로 도교에서 개척한 불로장생과 연결되는 환상의 세계가 허황되기는 하나 그 나름대로 위안과 희열을 가져다 주었으므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었다.

도교에서는 천계가 욕계 육천(欲界六天), 색계 십팔천(色界十八天), 무색계 사천(無色界四天), 상사천(上四天 또는 四梵天), 삼청경(三淸境), 대라천(大羅天) 도합 36천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최하위의 욕계 육천에 사는 사람도 수명이 1만 년이고, 그 위의 색계 십팔천의 사람은 수명이 1억만 년이며, 무색계 사천에 사는 사람은 수명이 억겁 년(億劫年)이다. 상사천부터는 사람을 죽게 하는 삼재(三災)가 없어서 죽음이 취소되고 그야말로 장생불사하여 무량수를 누리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득도하여 신선이 되어 천계에 오르면 수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라천에는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 천존(元始天尊)이 있고, 그 아래의 옥청(玉淸:淸微天, 元始天尊) 상청(上淸:禹餘天, 靈寶天尊) 태청(太淸:大赤天, 道德天尊) 세 군데로 이루어진 삼청경에는 각각 중앙과 좌우의 세 궁전이 있고 그 궁전에는 선왕(仙王) · 선공(仙公) · 선경(仙卿) · 선백(仙伯) · 선대부(仙大夫)가 있어 현세의 궁정조직 같이 되어 있다.

한편 도교에서는 또 십주(十洲), 삼도(三島), 십대동천(十大洞天), 삼십육동천(三十六洞天), 칠십이복지(七十二福地) 등 지상에도 선진인(仙眞人)이 사는 동천복지로 불리는 각종의 낙원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선진인이 사는 천지간의 선계와 그 밖에 있는 속계가 있는데, 선계와 속계 사이에는 내왕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 도교에서는 성수신앙(星宿信仰)을 받아 들여, 북극성(北極星:玄天上帝), 북두성(北斗星:北斗神君), 남두성(南斗星:南極長生大帝), 문창성(文昌星:文昌帝君), 삼태성(三台星) 등을 경배한다. 한편 도교에서 받드는 신은 성황신(城隍神) · 토지신 · 삼관(三官) · 사어(四御) · 재신(財神) · 문신(門神) · 조신(竈神) · 왕령관(王靈官) · 관제(關帝) · 낭낭(娘娘) · 용왕 · 팔선(八仙) · 여조(呂祖) · 마조(媽祖) 등 그 수효가 적지 않다.

중국 도교 교단의 성립과 변천

원시 도교 교단

후한(後漢) 말년(2세기에서 3세기 초에 걸친 시기)에는 정치의 난맥으로 혼란이 극심해지고 환관(宦官)의 횡포와 부호들의 방종이 심해서 일반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의지할 곳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도교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五斗米道)라는 종교 집단이 생겨났다. 후한 순제(順帝:125∼144 재위) 때 우길(于吉 또는 干吉)이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를 감득(感得)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종교집단을 만들고 그 도서명(道書名)을 따서 태평도를 표방했다.

우길의 뒤를 이어 장각(張角)이 교주가 되어 태평도의 조직을 굳히고 도서(道書) · 부적(符籍) · 참회(懺悔) 등을 사용하여 시행한 질병치료의 방법이 주효해서 많은 도당을 얻어 왕실을 타도하고 자기가 천하를 잡을 욕심으로 무장 봉기했다. 이른바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이다. 장각이 전사한 후 태평도는 몰락해 버렸다.

태평도보다는 좀 늦게 장능(張陵, 또는 張道陵:?∼178)이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 146~167)와 영제(靈帝:147∼189) 때에 오두미도를 시작했다. 오두미도가 태평도와 계승관계가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장능은 만년에 유학을 버리고 장생법을 배워 황제(黃帝)의 구정단법(九鼎丹法)을 터득했고, 또 사천(四川) 학명산(鶴鳴山)에서 도서(道書)의 저술과 수도에 전념한 끝에 수많은 신이 강림해서 신출정일맹위법(新出正一盟威法)을 그에게 전수했다는 것이다. 장능은 이 법으로 질병을 고쳐 주어 수많은 신도를 얻어 쌀과 비단을 바치는 법을 정하고, 신도를 통할하는 직책을 만들어 종교집단을 이루었다.

장능의 손자 장노(張魯)가 오두미도를 계승하여 그 교법과 조직을 완성시켜, 한 왕국을 방불케 하는 조직화된 종교집단을 성립시켰다. 장노가 조부 장능을 천사(天師)라 칭해 오두미도를 천사도(天師道)라고도 불렀다. 부(父) 장형(張衡)을 사사(嗣師), 자신을 계사(系師)라 하여 조부손이 법계(法系)를 계승한 것같이 말해 삼장(三張)으로 합칭하기도 한다. 장노가 조조(曹操, 155∼220)에게 굴복해 죽으면서 교세가 약해졌으나 천사도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정일교(正一敎)의 전신으로 도교 정통의 자리를 차지해 내려왔다. 태평도와 오두미도 내지 천사도는 부적과 도록(道籙)을 존중한다 하여 부록파(符籙派)로 불리기도 한다.

단정파

복용하면 불로장생하는 신선이 된다는 선단(仙丹) 또는 금단(金丹)으로 불리는 영약(靈藥)의 연조(煉造)는 선진(先秦)시대부터 전해지지만 후한 말기 오(吳)의 위백양(魏伯陽, 147∼167?)이 저술한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약칭 참동계)는 금단도(金丹道)를 천명한 대표적인 도서(道書)로 받들어진다. 다만 위백양은 자기가 저술한 『주역참동계』의 방법에 따라 연조한 금단을 먹고 일단은 죽었다가 되살아나 다시 약을 먹고 진인(眞人)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금단 연조에 주력하는 이 계열의 도인(道人)들을 단정파(丹鼎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晉)의 갈홍(葛洪, 283∼343)이 저술한 『포박자(抱朴子)』 4, 「금단」편에는 금단도가 자신 있고,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는 후한 말기의 좌원방(左元放)으로부터 그의 종조(從祖) 갈선공(葛仙公)과 갈선공의 제자 정군(鄭君)을 통해 전해진 『태청단경(太淸丹經)』 3권, 『구정단경(九鼎丹經)』 1권, 『금액단경(金液丹經)』 1권 및 구결(口訣)을 전수해서 금단도에 달통할 수 있었다고 자술하였다.

북송 초기의 장군방(張君房, 1004 진사 급제)의 『운급칠첨(雲笈七籤)』에도 금단의 연조방법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금단은 외물(外物)의 도움을 받아 불로장생을 기하는 것으로 곧 외단(外丹)인데, 독성이 심한 광물의 합금으로 연조된 것이므로 복용하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다. 금단도는 후세의 도사들에게 전하여져 금단이 연조되기도 하였으나 그 금단으로 황제들까지 목숨을 잃고는 하였다.

도교 교학(敎學)의 개발

서진(西晉)과 동진(東晉)을 거쳐 남북조시대로 내려오는 동안 천사도는 변화를 거듭해 가며 상층사회와 민간에 두루 전파되어 신봉되었다. 천사도에서는 진나라 때 특히 『상청경(上淸經)』을 받드는 상청파(上淸派)가 생겨 전승되어 내려와 남조송(南朝宋)의 도사인 육수정(陸修靜, 406∼477)에 이르러 대량의 도경(道經)을 수집 정리하였고 배례(拜禮) · 송경(誦經) · 사신(思神)의 세 가지 방법으로 수도하여 마음을 닦고 행실을 깨끗이 하기를 강조하여 도교의 신학적인 수준이 제고되기 시작하였다.

상청파의 도법은 양대(梁代)로 내려와 도교학자이며 연단과 의약에도 조예가 깊었던 도홍경(陶弘景, 456∼536)에게 전수되었다. 도교의 신학은 도홍경에 이르러 집대성되었고, 그는 강소(江蘇)의 모산(茅山)에 은거하여 육수정의 도경정리사업을 크게 진전시키고 도교의 교학 체계와 금단도까지 정비해서 모산종(茅山宗, 茅山派라고도 함)의 창시자가 되었다.

신천사도(新天師道)

한편 북조에서는 북위(北魏)의 도사인 구겸지(寇謙之, 365∼448)가 신천사도를 내세워 도교를 철저하게 개혁하고 나섰다. 그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부터 운중음송신과지계(雲中音誦新科之誡)를 받았고, 천사도 개혁의 사명이 부여되었으며, 거기다 천사의 지위가 수여되었다고 한다. 신천사도에서는 신선설을 중심으로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삼고 복이(服餌) · 복기(服氣) · 도인 · 벽곡 등 양생법을 채택하였다.

불교의 체제 · 의식 · 조직 등을 모방하고, 유교의 예도(禮度)를 강조했으며 청허(淸虛) 등을 높여 도가사상을 끌어 들였고 노자를 도교의 시조 자리에 확고하게 앉혀 놓았다. 조미(租米), 전세(錢稅)와 방중술 같은 오두미도의 폐단을 배제하여 청정한 도교를 확립하려고 했다. 말하자면 신천사도는 부록파와 단정파의 교법을 조정 융합하기에 이른 것이다.

구겸지는 최호(崔浩, ?∼450)의 힘을 얻어 북위 태무제(太武帝, 440∼451 재위)의 귀의를 받고 도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신천사도의 단계에 와서 처음으로 조건을 갖춘 도교가 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당(隋唐) 시대의 도교

수(隋)의 왕조도 도교 교학을 연구하는 현도관(玄都觀)을 설치하고 『현도관일체경(玄都觀一切經)』을 완성시키는 등 도교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도교는 수를 거쳐 당(唐)에 내려와 북조의 신천사도와 남조의 교학 체계의 종합을 보게 되었다. 이 때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도사 왕원지(王遠知, 530∼635)와 반사정(潘師正, 586∼684)이 국가의 도교정책을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해 나갔던 것이다.

당대에는 도교를 중요시하는 정책을 썼는데 그 밑바탕에는 도교교단을 국가의 행정지배하에 예속시키기 위한 엄격한 정책이 깔려 있었다. 도교교단이 국가에 예속되어 1만 5천이 넘는 도사가 양성되었으며 2천이 넘는 전국의 도관(道觀)에 배속되어 주로 국가를 위해 양재기복(禳災祈福)하는 재초(齋醮)를 거행하게 하였고 기타 도교의 행사와 습속을 관장케 했다.

그리고 당실(唐室)의 조상으로 받드는 노자(老子:李耳)에게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의 존호를 올리고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민가에 두루 비치시키고 과거의 과목으로 넣었다. 도교를 연구하는 기관인 숭현학(崇玄學)을 설치하여 도력(道曆)을 제정하기까지 하였다. 민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도교는 이렇게 해서 민간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적이며 사회적인 사명은 퇴색해 버리고, 국가가 관장하는 관방 도교(官方道敎)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때라고 해서 국가에 예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도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안사의 난(安史之亂, 755∼763)을 경계로 해서 도교교단에 대한 당 왕조의 규제가 약화되면서 도교는 다시 서민화의 현상을 다소간 드러낸다. 당나라 말기에, 국가 통제하의 도사가 아니고 도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종리권(鍾離權)과 여암(呂嵒) 두 사람이 있다.

종리권의 자는 운방(雲房)으로 그에 관해서는 한대(漢代) 이래로 생존했던 인물로 보는 전설까지 있는데, 그는 여러 가지 진결(眞訣)과 도법(道法)을 얻고 마지막에는 공동산(崆峒山)에서 옥갑비결(玉匣秘訣)을 얻어 진선(眞仙)이 되었다고 한다. 종리권은 여암을 계도하여 그를 도인(道人)으로 도화(度化)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종리권은 신라의 유당 학인(留唐學人) 승 자혜(僧慈惠) · 최승우(崔承祐) · 김가기(金可記) 세 사람을 종남산 광법사(終南山廣法寺)에서 만나 많은 도서(道書)와 비결을 주고 내단 수련을 위한 도법을 전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도교에서는 종리권이 정양제군(正陽帝君)으로 받들어진다.

여암의 자는 동빈(洞賓)으로 종리권에 의해 도화되기는 하였으나 다시 여러 가지 도법과 비결을 얻어 초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특히 민간에서 많이 받들어졌다. 그는 순양연정경화부우제군(純陽演正警化孚佑帝君)으로 받들어진다. 이들은 수련적인 도교를 개발하여 전진교(全眞敎) 등 후대에 생겨난 도교 유파의 북오조(北五祖)로 추앙받으면서 조사(祖師)로 받들어지기까지 하였다. 오대(五代)의 도교는 서민화의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다.

송원(宋元)의 도교

송대에도 진종(眞宗, 997∼1021 재위)과 휘종(徽宗, 1100∼1126 재위) 같은 도교를 좋아하는 임금이 있어 도교는 국가의 비호를 받아 관방 도교의 색채를 다분히 드러내기는 하였으나 당 나라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당실에서 노자를 숭상한 것과는 달리 송실에서는 조신(祖神) 내지 수호신인 조현랑(趙玄朗)에게 호천옥황대제(昊天玉皇大帝)로 존호를 올려, 최고신의 호칭으로 천존(天尊) 대신 옥황(玉皇)이 정착하게 된다.

진종 때부터 전국 각지에 만수궁관(萬壽宮觀)을 설치시켜 천자의 무병장수를 기원케 하고 각지의 도관에는 국가에서 제거(提擧)를 파견하여 보호와 관리를 담당케 했다. 또한 『대송천궁보장(大宋天宮寶藏)』과 『만수도장(萬壽道藏)』 같은 대규모의 도교 일체경(一切經)의 편찬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전해지지 않으나, 대체의 내용은 장군방의 『운급칠첨』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다.

북송은 금(金)에 멸망하고 남송으로 들어가 국가는 극도로 쇠미해졌는데 이 시기에 정명도(淨明道), 태일교(太一敎), 진대도교(眞大道敎), 전진교(全眞敎), 무당도(武堂道) 등 새로운 도교 교파가 무성하게 생겨난다. 이들 새로운 교파들의 공통된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삼교 혼합(三敎混合)의 방향이다. 원대(元代)에는 세조(世祖, 1260∼1294)가 천사도를 정일교(正一敎)로 개칭하면서 보호해 주었고, 전진교도 번성하기는 하였으나, 그보다 앞서 원의 태종 10년(1238)에 태종(太宗, 1234∼1241) 어전에서 불교와의 교리 논쟁이 있은 뒤부터는 도교는 대체로 퇴색의 길을 걸었다.

명청(明淸)의 도교

명태조(明太祖, 1368∼1398)는 즉위 후 곧 도교교단을 통제하는 현교원(玄敎院)을 설치하여 도교를 엄격하게 통제하였고, 다시 도록사(道錄司)로 개편하여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각 지방에 도기사(道紀司)를 두어 도교교단의 행정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리고 도사의 최고 칭호인 천사(天師)라는 호를 천자의 권위를 침범한다 하여 사용을 폐지하고 진인(眞人)으로 고쳐 쓰게 하였다.

헌종(憲宗, 1164∼1187) 때에는 국가에서 공공연하게 도사와 불승의 도첩(度牒:면허장)을 팔기 시작하여 도사와 불승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조에서 정명도와 정일교의 지도자들을 도교교단의 최고 행정관직인 우정일(右正一)이나 좌정일(左正一)에 임명하는 등 도교교단의 세력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명실에서는 화북(華北) 지방의 도교를 전진교가, 강남 지방을 정일교가 각각 나눠 맡게 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세웠으나 실제로 전진교의 세력은 극히 약화되고 정일교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정통(正統) 10년(1445)에 『정통도장(正統道藏)』 5,305권과 만력(萬曆) 35년(1601)에 『속장(續藏)』 180권을 편찬 간행하여 유일한 도교 일체경(一切經)으로 오늘날까지 남게 되었다.

청대에 내려와서는 정일교에 대한 청실의 태도도 냉각되고 전진교도 금단도에 기울어지는 등 도교 교학의 지도적인 지위를 잃게 되었다. 청대의 도교는 대체로 삼교 혼합의 방향이 현저해지고 서민화의 경향이 실질적으로 뚜렷해진 점을 특색으로 들 수 있다.

한국 도교의 성격

단군신화와 신선설

중국 신선방술의 발생과는 별도로 우리 나라에는 고대로부터 도교를 수용하기에 적합한 토착적인 고유 문화현상으로서 산악신앙 · 신선설 및 그것들과 연관이 있는 각종의 방술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선, 고대의 건국신화가 산악신앙 및 신선사상과 직결되어 있으니, 단군신화를 보면 그것을 곧 알게 된다.

천제 환인(桓因)의 지차아들인 환웅(桓雄)이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강림한 곳은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밑이었다. 환웅의 아들로 태어난 단군을 본원으로 하여 이 땅 특유의 신선사상이 전개되고 이 땅의 선파(仙派)가 생겨나게 된다. 단군신화에 언급된 홍익인간이라는 이념은 한국 신선사상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고, 후세 선파에서 내세운 환인과 환웅으로 연결시킨 단군의 정신과 교훈은 인간만사의 도리와 우주삼라만상의 이치를 두루 포괄하는 것이었다. ‘결청지학(潔淸之學)’ · ‘연양지도(鍊養之道)’ · ‘인간선사(人間善事)’ · ‘신도묘덕지훈(神道妙德之訓)’ 등의 용어가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환인의 도가 환웅과 단군을 거쳐 전해져서 그것이 다시 문박씨(文朴氏) · 을밀(乙密) · 영랑(永郎) · 안류(晏留) · 보덕성녀(普德聖女) 등으로 이어져 내려 왔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와 같은 선가설은 퍽 오래 전부터 전승된 것으로 짐작된다. 선파로 지목된 인물은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져 내려 온 것 같은데, 이 부류에 속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불우한 은자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들 선파 사이에서는 중국의 지배를 배격하는 주체적인 사관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고, 중국문화로 동화되는 것을 경계하며 자주적인 문화의 건설을 모색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무한한 저력에 대한 신심과, 우리 겨레가 세계를 영도하는 지위에 오를 영광된 장래가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 밖에도 신선과 결부시켜 예술가를 경애하는 등 우리 고유의 선가설과 관련된 특징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우리 고유의 신선사상은 그 전승과정에서, 수련적인 도교와 습합하면서 변천하여 내려 왔다. 따라서 이러한 신선사상은 도교적인 문화현상으로 간주하여 한국 도교의 특징의 하나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과의 중심 도교

이 땅에 도교가 정식으로 도입된 것은 고구려 말기였고, 그것은 주로 국가를 위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禳災祈福] 재초(齋醮)를 중심으로 한 과의(科儀)를 중시하는 도교였다. 이 시기는 고구려가 대륙 깊숙이까지 파고 들어 큰 판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나라에서 도교를 도입해 당시의 고구려 사상계를 개편함으로써 정권을 성공적으로 확보하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은 큰 판도를 지탱해 나가는 국력을 길러 중국의 침략을 분쇄할 수 있었다.

신라가 당나라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토멸한 뒤 신라는 고구려가 차지했던 대륙의 강역은 당나라에 빼앗기고 장악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조사로는 국가를 위하여 양재기복하는 도교의 재초가 신라에서 행해진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도교의 재초가 극히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그리고 예종 때에 와서는 도관인 복원궁(福源宮)을 건립하는 등 국가적 종교로서의 도교가 강화되었다. 대외정책도 한때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고구려의 유민이 발해국을 창건하고, 고려는 발해의 혈통을 이어 결국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도교와 관련시켜 볼 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과의 중심의 도교가 국가의 비호 아래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유신(儒臣)들 사이에서는 한낱 제후국에 지나지 않는 조선에서 하늘을 제사한다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라 하여 도교의 재초를 극렬하게 반대하였고, 대단한 논란이 되풀이된 끝에 소격서(昭格署)가 혁파되고 말았다. 우리 역사에서 도교와 대판도주의는 상관관계가 없지 않으리라는 견해도 있는데, 그것은 대체로 과의적인 도교의 기복을 배경으로 도출되었으므로 과의도교는 한국 도교의 한 특징으로 꼽히게 된다.

수련 중심 도교

한국 도교의 세 번째 특징으로 수련 중심 도교가 우리 지식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들 수 있다. 『해동전도록』에 따르면, 수련적인 도교는 신라 말기 유당학인(留唐學人)들이 당나라에서 도입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이 땅의 도맥도 이로부터 형성되었다. 이 도맥을 보면 신라 때는 최치원(崔致遠)이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고려시대는 비약이 심하여 보잘 것이 없으며, 조선 초기로 내려와서는 김시습(金時習)이 중흥시조 같은 지위를 차지하여 그 전승이 뚜렷해진다.

불로장생 같은 현세적인 이익의 추구가 그 중심이 되는 도교에서 수련을 통해 불로장생을 획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것들은 결국 마음의 평정과 신체의 건강에 이바지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수련적인 도교는 우리의 옛 지식인들에게 어느 면으로는 인생의 운치나 위안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동시에 좋은 건강관리법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들은 수련적인 도교에 양생법이 있음을 인식하고, 심지어 이황(李滉) · 이이(李珥) 같은 학자들까지 그것을 받아 들여 실생활에 응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편, 도교에서는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수련을 통한 건강관리법을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특한 의학을 수립하기까지 하였다. 도교의학은 고려시대에 이미 들어온 바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우리 의학이 도교의 이론에 따라 철저하게 체계화되었다. 도교에서는 예방의학이 대단히 강조되어, 평소에 신체의 조화를 깨서 질병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생활하는 것이 최상의 방편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도교적인 의학사상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의서인 『동의보감』 편찬에 수용되어 엄연한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도교의 수용과 그 전개

오두미도(五斗米道)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에 인용된 「고구려본기」의 기사에 따르면 7세기 전반에 고구려인들이 다투어 오두미도를 신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땅에서 오두미도가 시작된 지 거의 5세기가 지난 때였으므로 그것이 들어온 경위가 문제이다. 중국의 도교는 후한 말기를 전후하여 성립한 태평도(太平道)와 천사도(天師道)를 조형(祖型)으로 형성되었는데, 천사도는 곧 오두미도의 교법과 조직을 정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오두미도란 입교자에게 쌀 닷말씩을 바치게 한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후한 환 · 영제(桓靈帝) 때 장릉(張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고구려에서 7세기경 민간에 오두미도가 성행한 이유를 지금으로서는 상세하게 살펴볼 방도가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4 고국천왕 19년조에, ‘중국이 크게 혼란해져 한인(漢人)이 난리를 피하여 내투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 그것은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2년(197)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이 때 내투한 중국인이 오두미도를 가져왔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장로가 오두미도를 정착시킨 시기보다 이르고, 태평도의 교주였던 장각(張角)과 동시대의 사람인 장수(張脩)가 만든 초기의 오두미도가 피난민과 함께 고구려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이 때 유입되었다면 고구려의 오두미도 신봉의 역사는 퍽 길어진다.

가장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6세기 초 중국에서 천사도로도 불리는 오두미도가 중국의 연안지대를 거쳐 민간을 통해 고구려에 전파되었으리라는 점이다. 고구려에서 신봉되었다는 오두미도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규모의 대소는 어떻든 간에 신도들을 통할하는 조직이나 기구가 존재하였을 것이고, 『도덕경』의 송독, 삼관수서 · 부적 · 기도 등도 시행하였을 것이다.

도교의 도입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에 따르면, ‘영류왕 7년(624) 당나라 고조(高祖)가 고구려에 도사를 파견하여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니, 영류왕은 나라사람들과 함께 그 강론을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도교가 정식으로 고구려에 전래하였으나 그것이 국가적인 종교로 정착하지는 못했다. 그 뒤 20년이 경과하여 643년(보장왕 2) 당시의 실권자 연개소문의 건의로 당나라 태종으로부터 숙달(叔達) 등 도사 8인과 『도덕경』을 얻어와 도교를 국가의 종교로 유교 · 불교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하였다.

보장왕은 불교 사찰을 도관으로 만들어 도사들을 그 곳에 거처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여러 도교행사를 곁들여 국가를 진호하는 재초를 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경위로 도교가 고구려에 정식으로 도입되었고, 도교가 국가를 진호하는 소임을 담당하는 성격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연개소문이 도교 강화책을 쓴 데는 고구려에서 유 · 불의 세력을 감쇄시킬 기도도 있었겠으나, 도교를 숭상하는 당나라의 종교정책이나 문화정책과 맞서 보겠다는 속셈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본전(本傳)에 인용된 바와 같이 그가 국왕에게 고한 말에 “듣건대, 중국에서는 삼교가 병행한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는 도교가 아직도 빠져 있습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것을 구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것을 음미해 보면 그러한 의도를 읽어 볼 수 있다. 그리고 보장왕 본기의 기사에도 “삼교는 마치 세 발 솥의 발 같아서 하나가 없어도 안 됩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다 흥왕한데, 도교는 아직도 성하지 않으니 이런 상태로서는 천하의 도술을 다 갖추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 그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전부터 민간의 오두미도 신봉이 있었으며, 20년 전 영류왕 때 도사 · 천존상 · 도법 및 『도덕경』의 전래가 있었고, 또 보장왕 때에는 도교가 국가의 종교로 강화되었으니, 고구려에서 도교는 생소하게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평양의 성세(城勢)가 반월성이어서 국세의 위약을 나타낸다 하여 도사들이 나서서 주축(呪祝)으로 상제(上帝)가 남하룡(南河龍)에게 조칙을 내려 그것을 만월성으로 가축(加築)하게 하고, 그것을 용언성(龍堰城)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는 도교를 이용한 심리전략이었다고 하겠다.

불교측의 반발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도교를 국가 종교의 주도적인 지위에 올려 놓은 일은 마치 5세기 중엽에 북위(北魏)에서 최호(崔浩)가 태무제(太武帝)를 귀의시켜 구겸지(寇謙之)가 영도하는 신천사도(新天師道)로 정비된 도교를 국가 종교로 굳게 자리잡게 하고, 이어 그때까지 지반을 굳히고 있던 불교를 탄압한 선례를 재연한 듯한 느낌을 준다. 유교와는 종교적인 색채가 그리 짙지 않고 사찰을 빼앗기는 따위의 피해도 없었으므로 큰 충돌이나 마찰이 생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종교적 지반을 굳히고 있었던 불교는 도교의 본격적인 도입과 그 강화로 인해서 극심한 타격을 받았으므로 불교측은 도교 강화책에 대하여 정면으로 항거하였다. 승려 보덕(普德)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에 있던 반룡사(盤龍寺)에 거처하던 당시 불교계의 영도자였는데, 그가 “좌도(左道:도교)가 정도(正道:불교)에 맞서서 나라의 명맥이 위태로워짐을 슬퍼하여 누차 국왕에게 간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고 한 것이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에 기록되어 있다.

나라의 명맥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에 도교 강화책을 반대한 것은 핑계였고, 실상은 불교의 탄압에 항거하고 나선 것이라고 하겠다. 보덕은 평양에서 전주로 남하할 때 신력(神力)을 발동시켜 방장(方丈:거처하는 암자)을 날려서 단숨에 고대산(孤大山)까지 옮겨 갔다고 한다. 이렇게 고승이 신력을 발휘했다는 고사는 도교측의 도력(道力) 과시에 대한 대항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결국, 도교 강화책의 여파로 보덕과 같은 사례가 많이 생겨, 불교는 고구려 이외의 나라에 전파되었다.

수련적 도교와 방술(신라의 도교)

도교의 잡술

신라시대는 도교의 잡술을 연상시키는 기적을 나타내고 신이한 방술을 구사한 인물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선, 신라 초의 호공(瓠公)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도와 인접국과 수교의 사명을 수행하여 신라의 국위를 떨친 인물인데 바람과 비, 새와 짐승을 마음대로 부리는 대단한 방술을 행사했다고 전한다.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에 관해서도 방술의 신비성을 띤 설화가 『삼국사기』 권41∼43의 본전과 『삼국유사』 김유신조 등에 전한다. 김유신은 등에 칠성문(七星文)이 있었는데, 그것은 칠요(七曜)에서 정기를 받은 표시라고 하여 생래적으로 신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여겨졌다. 그는 17세 때 이미 큰 뜻을 품고 단신으로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서 통삼대공(統三大功)을 성취할 힘을 내려 주기를 기도했는데, 신이한 노인이 나타나 김유신의 요청대로 방술의 비법을 전수했다.

그 뒤 또 열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천관(天官에게 빛을 드리워 자기 보검에 강령(降靈)해 달라고 비니, 두 별에서 광채가 내려와 그의 보검을 동요시켜 신령한 기운을 내려 주었다. 김유신의 보검은 고구려군과의 접전에서 신비한 위력을 발휘했다. 또한, 그는 항시 음병(陰兵)의 호위를 받고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김유신에 관련된 신이한 설화들은 도교적인 색조가 농후하고 도교의 잡술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김유신의 증손 김암(金巖)도 방술을 좋아하여 숙위(宿衛)로 당나라에 가 있을 때 도교 방술에 포괄되는 음양가법을 배우고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터득하였다. 그는 귀국 후 사천대박사(司天臺博士)로 팔진병법(八陣兵法)을 가르쳤으며, 하늘에 빌어 메뚜기의 재해를 물리치는 등 방술을 구사하였다.

이 밖에도 신라시대는 시가(詩歌)와 결부된 이적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월명사(月明師)가 「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해가 둘 나타난 괴변을 없앴고, 융천사(融天師)가 「 혜성가(彗星歌)」를 지어 혜성을 없애고 침범해 온 왜군을 제발로 물러가게 하였다는, 향가를 둘러싼 전설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을 방술만으로 처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그렇다고 방술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나말 학인들과 도교

신라 말기에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의 학인들 가운데 수련적인 도교를 이 땅으로 전한 인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해동전도록』 같은 우리 나라의 도서(道書)에 그 경위가 비교적 소상하게 다루어져 있다. 당시 당나라에는 각처에 도교 사원인 도관이 건립되어서 국가나 개인이나 양재기복하는 재초, 곧 과의적인 도교의 제례행사가 매우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그래서 당시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의 학인들에게는 도관의 재초는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도교의 재초에 사용하는 제문이나 축문은 재사(齋詞)니 청사(靑詞)니 하여 불가의 도량문(道場文) 등과 구별된다. 최치원과 같이 한때 당나라에서 벼슬을 살면서 문한(文翰)을 다루던 사람은 당나라에 있을 때 이미 적지 않은 재사나 청사를 짓기까지 하였고, 그 글이 문집 등에 수록되어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므로 당나라에 유학했던 신라의 학인들에 의해 수련적인 도교가 이 땅에 이입되었다고 보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견해라고 할 만하다. 9세기 중엽 신라의 학인 최승우(崔承祐) · 김가기(金可記)와 승려 자혜(慈惠) 등 3인이 중국에 유학하여 종남산(終南山) 광법사(廣法寺)에서 천사(天師) 신원지(申元之)를 만난 것이 기연이 되어 신원지의 알선으로 종리권(鍾離權)으로부터 『청화비문(靑華祕文)』을 비롯한 여러 가지 도서(道書)와 구결(口訣)의 전수를 받았고, 3년 동안 수련한 끝에 단(丹)을 이룩하였다.

여기에서 단을 이룩하였다고 한 것은, 신선이 되는 약인 금단연조에 성공했다는 뜻이 아니라, 심신의 수련을 통한 공행이 양전한 득도의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말한다. 김가기는 한때 신라에 다녀갔으나 『속선전(續仙傳)』 등의 기사를 보면 858년 2월 25일 당나라에서 백주에 신선이 되어 올라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보다 11년 뒤인 869년 당나라에서 유학한 최치원과 역시 유당학인인 이청(李淸)에게 김가기가 구결을 전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승우는 신라로 돌아와 태위(太尉) 벼슬까지 지냈는데, 그도 귀국하여 최치원과 이청에게 구결을 전수하고 93세의 장수를 누렸다.

자혜는 의상(義湘)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맞는 견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는 귀국 후 오대산으로 들어가 승려 명법(明法)에게 도요(道要)를 전수하고 145세에 태백산에서 입적(入寂)하였다. 환인 이래, 이 땅 고유의 도맥 이외에 유당학인을 통해 수련적인 도교가 흘러 들어와 새로운 도맥을 이어 나가게 된 것이다. 최치원은 김가기와 최승우 두 선배로부터 도요를 전수받았을 뿐 아니라, 자혜의 계통에 속하는 권청(權淸)과도 접촉이 있어 도법을 연마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당학인이 이 땅에 형성한 새로운 도맥은 고려와 조선에까지 전승되었는데, 그 계보는 최치원에서 직접 뻗어나가지 않고 이청으로부터 이어져 내려갔다. 이청은 명법에게 구결을 전수하고, 명법은 다시 자혜로부터 도요를 배운 뒤 권청에게 전수하였고, 권청은 최치원과 도법을 연마한 뒤 그것을 후대에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이 땅에 들어온 수련적인 도교는 기인괴사들의 단학설화(丹學說話)도 생겨나게 하고, 도교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기풍을 조성해서 일반 학인들이 흥취를 구하는 한 가지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

수련적인 도교의 전승

『해동전도록』은 규장각본에 조선 중기의 한무외(韓無畏)가 기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무외는 곽치허(郭致虛)로부터 도요를 전수한 것으로 되어 있고, 곽치허가 그에게 한 부탁이 “정양(正陽)의 한 줄기 맥이 실추되지 않으리니 힘쓰고 힘쓰라.”로 맺어져 있다. 정양은 중국 당나라 때 사람 종리권의 존호이다.

본성적인 단학은 중국에서는 금대(金代)에 성립된 도교의 한 종파인 전진교(全眞敎)에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전진교에서는 여동빈(呂洞賓)을 종조(宗祖)로 받드는데, 여동빈은 종리권의 전수로 득도하여 선화(仙化)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전진교에서는 종리권을 정양제군(正陽帝君)으로 존칭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전진교의 성립은 12세기 초부터 시작되는 금대에 내려와서이므로, 김가기 등 신라의 유당학인들이 본성적인 단학을 중심으로 한 도교를 수련한 일을 전진교와 결부시켜 논할 수는 없다.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전진교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내단수련을 중심으로 하는 도교의 일파가 당대에 이미 형성되어 있어서, 김가기 등 신라의 유당학인들이 그 계통의 도교와 접촉을 갖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따진다면, 그러한 도법이 유당학인에게 전수되었다는 것은 전혀 무근한 일이고, 금대에 시작된 전진교의 한 분파의 교법이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중국에서 들어온 뒤 이 땅에서 그 계통의 도맥을 소급 설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러한 내력을 조작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들이 전승한 단학은 환반지학(還返之學)과 시해(尸解)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고 하나, 전수된 도서와 저술된 도법은 다양하다. 수련적인 도교에서의 환반의 뜻은 금단 연조에서의 칠반구환(七返九還)의 법을 본성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대체로 심신 · 성정 · 육체에 걸쳐 분산된 정력을 수습해서 응집된 상태에서 유지, 보존하여 장생불로에 이르게 하는 수련방법이라 하겠다. 시해는 도법을 수련한 끝에 죽는 형식만을 빌려 신선이 되는 방법이다.

도교의 재초와 습속(고려의 도교)

재초의 거행과 그 종류

신라시대에는 왕명에 따라 변이(變異)를 기도로써 물리친 일이 있었다고 하나 어떠한 방법을 따랐는지는 알 수 없고, 도교의 재초가 국가 행사로 거행되었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국가를 위해 소재초복(消災招福)하는 재초 등의 과의적인 도교행사가 자주 열렸고, 심지어는 의종같이 군왕 자신의 개인적인 소재초복을 위해 국비를 기울여 각종의 재초를 번거롭게 지내는 사례도 있었다.

이렇듯 고려에서 과의적인 도교가 성행한 데는 고려초 이래 대량 이주한 발해인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발해는 고구려인에 의하여 세워졌으므로 도교를 숭상하던 풍습도 전승되었을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현종 때부터 재초가 행하여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 뒤 예종 때는 재초가 자주 거행되었고 그 종류도 다양하여진다.

옥촉정(玉燭亭)에 원시천존(元始天尊)의 도상(道像)을 안치하고 월초(月醮)를 지내게 한 일이라든지, 도관인 복원궁을 수도에 창건하여 각종의 도교행사를 집행하게 한 일이라든지 하는 것은 예종 때 특히 두드러진 도교숭상 사례이다. 그러나 수련적인 도교는 고려시대에 별로 성행한 것 같지 않아서, 그 방면의 전설이나 설화는 그다지 많지 않다.

고려시대에 거행된 재초의 종류는 천계(天界)를 대상으로 한 호천상제(昊天上帝) · 호천오방제 · 천황대제(天皇大帝) · 태일(太一) · 천조(天曹) · 삼계(三界) · 삼청(三淸) 등과, 성수(星宿)를 대상으로 한 남두 · 북두 · 노인성 · 11요(曜) · 28수 · 12궁신 · 27위신 · 100신(神) · 본명성수(本命星宿) 등과, 재변양제(災變禳除)를 위한 도우(禱雨) · 도병 · 5온신성변기양(五瘟神星變祈禳) 등과 기타 전성제천(氈城祭天) · 별공재초(別貢齋醮) · 마리산참성초(摩利山塹城醮) · 하원초(下元醮) 등이 있다.

이러한 재초에는 그 축문인 재사 또는 청사가 있는데, 그것을 지어 정서한 뒤 국왕이 친서하고 신료가 대독하였던 것이다. 고려 후기 이후의 재초에 사용한 청사는 『동문선』에 작자명과 함께 여러 편이 실려 있다. 그 문체는 대체로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로 되어 있고, 내용은 도교의 설법을 곁들여 국왕의 처지에서 재앙을 양제하고 복록을 기원하는 뜻이 있다.

도교 연구와 도관 건립

고려시대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도교 전적이 많이 읽혔는데, 그 중 이중약(李仲若)은 도교연구에 남다르게 열중하였던 인물이다. 임춘(林椿)의 「일재기(逸齋記)」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도교적인 성품이 있어 『도장(道藏)』을 즐겨 읽었다. 청년기에는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의 월생산(月生山:지금의 月出山)에 집을 지어 일재라 하고 세속을 떠나 거기에서 『황정경(黃庭經)』 같은 도서를 읽으며 수도생활을 하였으며, 도교수련과 직결되는 의술도 연구하여 일가를 이루는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의 의술이 알려져 숙종의 병을 시술하도록 불려 갔으나 궁궐에 도달하였을 때는 숙종이 이미 운명한 뒤였다.

예종이 그를 좋아하여 궁중에 머물러 있게 하며 도교의 요리(要理:중요한 교리)로 응대하고 지냈다. 그 뒤 그는 바닷길로 송나라로 건너가서 황대충(黃大忠)으로부터 직접 도요를 전수받고 도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돌아왔다. 귀국 후 이중약이 예종에게 상소하여 현관(玄館:도교사원)을 설치하여 국가 재초의 복지(福地)로 삼도록 한 건의가 받아 들여져 건립된 것이 복원궁이었다.

이중약은 복원궁의 강석(講席)에서 큰 종을 울려 도교의 요리를 가르쳤는데, 그것을 배우러 모여든 사람들이 문을 메웠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복원궁은 왕부의 북쪽 태화문 안에 있었고, 전내(殿內)에는 삼청상(三淸像)이 그려져 있었으며, 공행이 높은 도사 10여 인이 그곳의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이들 도사는 관원같이 낮에는 복원궁에서 일을 보고 밤에는 사실(私室)로 돌아가곤 하여 계율을 지키지 않아 속인과 다름없었다고 한다.

이 땅에 도교 교단이 성립되지 않은 원인을 이런 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송나라 휘종(徽宗)은 1110년(예종 5) 중국 도사 2인을 신사(信使)로 딸려 보내 고려에서 도법에 통달한 자들을 골라 지도해 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 고려에는 도교 교법과 의식에 조예가 있는 인사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또, 1118년 송나라 휘종이 보낸 의관 7인이 고려에 와서 2년 동안 고려의 의학인들에게 중국의학을 가르쳐주어 고려의 의약행정이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도교의학도 도입되어 이 땅의 의약전통에 참여하기에 이른 것으로 여겨진다.

도교습속

고려시대 도교의 장생법과 사과신적(司過神的) 신앙에서 생겨난 수경신(守庚申)의 습속이 상하계층에 널리 퍼져 있었고, 그것이 조선시대까지도 지속되었다. 수경신은 경신수야(庚申守夜) 곧 경신일마다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우는 습속이다. 도교에서는 사람마다 주어진 수명은 2주갑, 즉 120세인데 그가 저지르는 악행의 정도에 따라 그 비례로 수명이 단축된다고 본다.

사람은 악행에서 완전히 벗어나 살기는 어려운데, 삼시충(三尸蟲)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가 인체 내에 기생하면서 그 숙주(宿主)가 저지른 악행을 살펴 60일마다 오는 경신일 밤 숙주가 잠든 사이에 빠져 나가 천제에게 그것을 고해 바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례보고를 막기 위해 삼시충이 체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경신일 밤을 자지 않고 지새우는 것이 수경신이다.

밤을 새우는 일은 무료하므로 주연을 벌여 노는 축제 성격을 띠게까지 되었다. 『고려사』 1265년(원종 6) 4월조에 ‘경신일에 태자가 안경공(安慶公)을 맞아다가 잔치를 베풀고 날이 샐 때까지 음악을 연주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경신일에 수야하는 습속을 태자까지 따른 것을 지탄한 것이다. 이러한 수경신의 습속은 조선 초에 이르는 동안 1년의 6경신을 다 수야하는 일은 줄어 들고, 연말 무렵의 마지막 경신일을 철야 축제행사로 지키게 되었다. 조선시대 민간에서는 경신수야의 습속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제가의 문집에 경신수야를 읊은 한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도교비판과 그 변천(조선의 도교)

과의적인 도교의 존속

조선시대에 와서도 왕실을 중심으로 도교가 신봉되어 대체로 고려의 유제(遺制)를 계승하였으나 그 규모가 축소되었고, 중도에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에 따라 국가 중심의 도교의식은 쇠퇴 일로를 걷게 되었다. 1392년(태조 1)에는 예조에서 고려 때 쓰던 복원궁 · 신격전 · 구요당 · 소전색 · 대청관 · 청계배성소 등 재초거행 장소를 폐지하고 송도에 있는 소격전(昭格殿) 한 군데만 두기로 하였다. 한양에 천도한 뒤인 1396년 초 정부(丁夫) 200인을 징발해서 한양에 소격전을 영조하였다.

1417년(태종 17) 소격전 제조로 있던 김첨(金瞻)에게 명하여 도교의 사전(祀典)을 상정(詳定)하도록 하였으며, 1466년(세조 12) 소격전을 소격서로 개칭하였다. 소격서는 도교 재초를 거행하는 국가의 관서여서 그 직제는 제조 이하 서원(署員) 8인과 도류(道流) 약간인 및 도학생 10인으로 되어 있었고, 도류의 공과(功課)와 도과(度課)의 제도가 있었다.

도류취재는 『금단(禁壇)』을 낭송시키고 『영보경(靈寶經)』을 읽히며, 과의는 『연생경(延生經)』 · 『태일경』 · 『옥추경』 · 『진무경(眞武經)』 · 『용왕경』 가운데 3경으로 하였다. 그리고 소격서에는 태일전 · 삼청전 및 내외 제단이 있어 옥황상제를 비롯한 수백에 이르는 도교 제신의 신위를 마련하고, 헌관 · 서원 및 도류가 분담하여 재초를 종합적으로 집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일설에는 소격서에 직수전(直宿殿)과 십일요전도 있었다고 한다. 집행된 재초의 종류는, 성신(星辰)을 제사하는 성수초, 태양성 및 화성초, 남 · 북두초, 금성초 · 태음초 · 진무초 · 직성초 · 형혹기초(熒惑祈醮) · 혜성기초 등이 있고, 그 밖에 개복신초 · 청명초 · 도병초 · 기우초 · 본명초재 · 진병초 · 삼원초 · 삼계초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연산군 대에 소격서가 일단 형식적으로 혁파되었으나 재초는 여전히 집행되었고, 중종조광조(趙光祖)가 주도하는 신진사류들이 소격서의 혁파와 왕의 천지신 제사 중지를 끈질기고 격렬하게 고집하여 1518년(중종 13) 소격서를 혁파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강화도 마니산의 제천행사는 참성초라 하여 도교의 재초로 거행되었고 소격서 혁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지식인들의 도교에 대한 태도

태종은 도교의 재초에 관심이 깊었고, 수련적인 도교에 대해서까지도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김첨과 공부(孔俯) 두 사람이 도교에 관련된 일로 태종을 도왔다. 김첨은 고려 말부터 벼슬을 하던 사람으로 도교궁관의 시설과 재초의 의례에 밝았다. 김첨은 도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부흥시키기 위하여 진력하였다. 그 목적은 결국 국가의 안녕과 태평을 구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고구려의 연개소문 이래 국가에서 도교를 숭봉한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고 하겠다. 그의 재략과 외교상의 공로를 생각하여 태종은 그를 버리지 않고 제례 등에 관해 그에게 자문하기도 하였다.

1404년 김첨이 성수초제를 상정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그는 대청관(大淸觀)을 수리해서 천황대제를 초제하려고 하였으나, 권근(權近)하륜(河崙)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해 태종에게 상서하여 과의적인 도교를 국가적 차원에서 숭봉할 것을 간곡하게 권하기도 하였다. 1408년 소격전의 제조로 있던 공부를 사은사서장관으로 딸려 보내 당시 중국의 도교 초사(醮祀)의 법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공부는 서장관으로 가기 전에도 이미 중국에 다섯 차례나 다녀와 중국의 언어와 풍속에 익숙하였던 것 같고, 수선(修仙)이라 자호한 것으로도 그가 도교에 대해 많은 흥미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여러 차례 동남(童男)을 거느리고 기우제를 지낸 일도 있다. 태종은 1413년 수진지사(修眞之事)를 묻기 위하여 아버지의 상중에 있던 그를 불러다 만나기까지 하였다.

중종 때 신진사류들은 소격서 혁파의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고 왕실측과 무섭게 대립하여 간접적으로는 기묘사화의 불씨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들의 상소는 “도교가 이단이고 허황되며 망령스럽고, 도교를 극도로 숭봉하던 당나라 현종(玄宗)이나 송나라 휘종은 오히려 앙화를 입고 수명을 연장할 수 없었다.”고 하여, 소격서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유교를 정도로 내세우고 도교를 사악한 이단으로 몰아 유도의 정맥을 뿌리 내리는 일을 자임하고 나섰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관제신앙(關帝信仰)이 흘러 들어와 관왕묘(關王廟)의 건립을 보게 되기도 했지만 과의적인 도교는 쇠퇴하였고, 성리학을 표방하는 지식인들은 표면적으로 도교를 이단으로 물리치는 태도를 취하였다.

민간의 도교

수련적인 도교의 도맥에 들어 있는 조선시대의 인물들을 비롯해 그와 연관된 많은 사람들의 기행과 이적에 관한 기사가 『어우야담』 · 『오산설림』 등 각종 만록에 보이는 데, 그러한 기사들을 단학설화로 합칭하기도 한다. 고려시대 권경중(權敬中) 같은 사람은 신선벽곡지술(神仙辟穀之術)을 배웠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서도 신선수련술을 좋아한 인사가 적지 않았다.

그 중 홍만종(洪萬宗)은 자신이 신선 · 도술에 기울어 다시 『야사제집』에서 단가이적의 기사를 집성하여 『해동이적』을 내기도 하고, 그의 만록인 『순오지(旬五志)』에도 신선 · 도술에 관한 기사를 많이 수록하였다. 홍만종의 경우도 자신의 건강유지를 바라는 마음에서 단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여겨지지만, 본래 도교의 수련은 양생법과 직결된다.

도학자들까지도 그 점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민간에는 직성기양(直星祈禳) 같은 성수와 연결된 행사와 습속이 적지않았다. 도교에서 다루는 성수 중 주요한 것은 칠정사요(七政四曜) · 남두육성(南斗六星) · 북두칠성이다. 그 중 남 · 북두에는 모든 사람의 궁함과 통함[窮通], 안락과 근심걱정[休戚]이 다 달려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북두가 더욱 존숭되는데, 그것은 지금의 북두칠성과는 달라서 북신성(北辰星), 즉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일곱 개의 별을 말하는 것으로 그 존숭의 핵심은 북극성에 있다. 북극성은 군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수록빈부와 생사화복을 위시한 모든 명운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었다. 『옥추경』은 북극성 경배의 진원이고, 또 의약과의 관련이 있어 옥추단이나 벽사문(辟邪文)으로 예방하는 습속이 생겨나게 하였다.

이 밖에 민간에는 삼재예방, 방위의 길흉, 동토 및 입택의 방법 등 인간만사에 부수되는 예방과 선택에 도교적인 풍습이 있었다. 그 중 특이한 것은 맹인, 즉 판수가 독경해서 민간의 제반사를 지시, 해결해 주는 구실을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결국 도교의 잡술을 맹인이 시행한 사례로, 거기에는 토속과의 합유(合糅)현상도 적지 않았다. 한 때는 명통사(明通寺)를 총본부로 하여 계층이 뚜렷한 맹인들의 조직이 있어 도사 중심의 도교교단과 비슷하였다.

도교의 전적과 양생론

도교의 양생론

도교의 수련은 건강을 유지하여 장수를 누리기 위한 방법이므로 그것은 곧 양생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습은 이론상으로는 불로장생을 꾀하는 것을 반박하였으나, 그의 잡저 「수진(修眞)」과 「용호(龍虎)」에서 도교수련법의 요체를 천명하였다. 「수진」에서 ‘신선이란 양성복기(養性服氣)하고 용호를 수련해서 늙음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라고 전제하고 『양생결』을 인용하여, ‘본성을 기르는 사람은 늘 약간의 노력을 원하나 지나치게 무리한 행위를 억지로 하지 않는다.’고 일러 주고 기행좌와(起行坐臥)에 걸친 주의사항을 나열하였다.

그리고 모든 일에 걸쳐 과도한 짓을 하지 않으며, 자기의 정(精)을 동요시키지 않고 마음을 적묵(寂默)으로 돌아가게 하면 장생하게 될 것임을 말하였다. 『용호』에서는 수련해서 장생하는 것은 천지의 정기(正氣)를 훔쳐내는 것임을 말하고, 그 요체는 호흡을 통하여 음진양순(陰盡陽純)해짐에 있고 공행이 차면 장생초탈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은 결국 일종의 양생론이다.

한편, 주희(朱熹)가 『참동계(參同契)』와 『음부경(陰符經)』 같은 도서에 관심을 갖고 교주(校注)작업을 한 것 등에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까지도 그러한 부류의 도서를 기탄 없이 열람하였고 도교적인 수련법에 대한 조예가 깊은 인사들도 나왔다. 이렇게 해서 일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심신수양, 건강관리, 또는 생활의 운치 등 다양한 의의를 도교적인 수련법에 부여하게 되었고, 동시에 종교적인 의의가 극도로 희석된 상태에서 수련적인 도교가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이(李珥)도 도교적인 방법을 감안한 의약책을 피력하였다. 그는 도교의 연단 · 등선의 설은 믿지 않으나, 도교에서 개발한 창양(昌陽) · 황정(黃精) 같은 연년익수(延年益壽)한다는 약물의 사용은 그것 나름의 이치가 있어 받아들일 만하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유교적인 효행이 강조되던 시대이므로 사친양로(事親養老)를 위하여 지식인들이 도교의 양생론과 의약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황(李滉)도 이찬(李澯)의 8폭 양생설을 보고, 주희가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를 사랑하는 뜻을 알게 되었고, 자기인들 양생하여 지선(地仙)이 될 수 없겠는가 하였다. 당시 지식인들의 도교적인 수련법에 대한 의식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도교의학

정렴(鄭磏)『북창비결』이라고도 하는 그의 저서 『용호비결』 제1장에서 내단을 수련하는 방법을 설명해 나가는 도중에 정기를 머물러 있게 하여, 풍사가 파고들지 못하도록 미리부터 방비하는 일종의 건강관리법과 양생법을 말하였다. 그리고 질병이 생겨난 뒤 의사를 찾아가 약을 쓴다 하여도 이미 늦는다고 하였다. 그 착상법은 근대의학적 처지에서도 충분한 의의를 가진다. 이러한 양생론이나 보건법은 확대 세련되어서 조선시대 의학의 기본 체계를 확립시키기에 이르렀고, 나아가서는 의학의 본의를 해명하는 데까지 전개되었다. 조선시대는 의서의 번각교주 및 언해가 정력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중 『동의보감』은 그 체계 정립에 도교의 철리가 솔직하게 받아들여졌고, 후생과 실용을 존중하는 도교의 특성이 의약의 본의 천명에 적용되어 있으며, 심지어 도교 잡술에 속하는 방법까지 소개되어 있다. 『동의보감』 내경편(內景篇) 집례(集例)에 “도교에서는 청정과 수양을 근본으로 삼고 의문에서는 약이(藥餌)와 침구로 치료를 한다. 이는 도는 그 정(精)을 얻었고, 의는 그 조(粗)를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견해를 살린 정연한 구성 밑에서 동양의약에 흔히 있는 허황하고 공상적인 의학론은 극력 배격하고, 의학에서 추구해야 할 궁극의 이치를 파악하여 당시 의학계의 온갖 지식을 총집결하고, 그 의의의 해명에는 도교의 후생과 실용을 존중하는 정신을 취하여 편찬한 것이다. 내경편에서는 도서를 많이 인용해서 신형(身形)과 정(精) · 기(氣) · 신(神)을 설명하고 의자는 무엇보다도 이것들을 보양, 치료할 것을 강조하였다.

외형 · 잡병 · 탕액 · 침구 제편은 실제에 맞는 일반적인 이론과 공평한 치료방법을 제시하기에 힘썼다. 본말과 정조의 구분이 엄연한 체계에 따라 편찬된 의서이다. 『동의보감』은 허준(許浚)의 주편으로 1612년(광해군 5) 내의원에서 그 초판이 간행되었다. 이 책의 편찬에 정렴의 아우 정작(鄭碏)이 참여하였으므로 정씨 형제의 도교적인 의학관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조선시대의 의서 가운데 도교적인 관점에서 쓰인 것이 많다. 이종준(李宗準)의 『신선태을자금단방(神仙太乙紫金丹方)』, 박운(朴雲)의 『위생방』, 정유인(鄭惟仁)의 『이생록(頤生錄)』, 정사위(鄭士偉)의 『이양편(二養編)』, 이창정(李昌廷)의 『수양총서유집(壽養叢書類輯)』, 최규서(崔奎瑞)의 『강기요결(降氣要訣)』, 서유구(徐有榘)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중 「보양지(葆養志)」 등은 다 그러한 의서들이다.

도교의 전적과 그 연구

기록상으로는 고려 중엽의 이중약이 『도장』을 읽은 최초의 인물이다. 그러나 신라 말기의 유당학인들이 많은 도서를 도입한 것으로 전해지므로 그때 『도장』이 이 땅에 들어 왔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규장각도서에 『정통도장(正統道藏)』이 있는데 조선 후기에 들여온 것이라 여겨진다. 신라 말기에 도입된 것으로 알려진 『참동계』는 『주역』과 황로(黃老)와 노화(爐火) 세 가지의 요체를 융합하여 묘치 있게 대도를 터득한다는 뜻을 나타냈다는 도서로 후한 위백양의 저술이다. 이황도 장수를 희구하는 견지에서 『참동계』에 큰 관심을 표명하였고, 권극중(權克中)『참동계주해』를 펴냈으며, 최석정(崔錫鼎)민이승(閔以升)도 『참동계』를 비롯한 도서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황정경』도 주요 도교경전의 하나로 양생의 요결을 다룬 것인데 우리 나라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혀졌다. 『음부경』은 자연의 이치를 체득해서 그것을 운용하는 묘리를 쓴 것으로, 역시 우리 땅에서 많이 읽힌 도교경전 중의 하나이다. 『옥추경』은 위작으로 고증되기는 하였으나, 질병을 낫게 해준다는 속된 내용 때문에 조선 초기에도 송독되었고, 1733년(영조 9)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서 개간한 조선각본도 있다. 『포박자(抱朴子)』도 도교경전의 하나로 편입되어 있는데, 우리 선현들 중 건강과 장수를 희구하고 아울러 인생의 운치를 돋우는 뜻에서 『포박자』를 애독한 사람이 많았다.

1417년(태종 17) 명나라 성조(成祖)가 선음즐서(善陰騭書) 600부를 보내 왔다. 선음즐서는 유 · 불 · 도 3교의 사상을 융합한, 선행을 권장하는 책들인데 선서(善書)로 약칭되기도 한다. 권선징악이라는 사회 교육적인 의의가 있다고 하여 선서가 조선 초기부터 한말까지 계속 널리 읽혔고, 각종 선서의 번각과 언석(諺釋)이 나왔다. 『옥황보훈(玉皇寶訓)』 · 『주생연사묘응진경(注生延嗣妙應眞經)』 · 『경신록(敬信錄)』 및 그 언석, 『삼성훈경(三聖訓經)』 · 『과화존신(過化存神)』 · 『감응편도설(感應篇圖說)』 · 『공과격찬요(功過格纂要)』 등이 조선시대에 출간된 주요한 선서들이다. 『공과격』은 선행과 악행을 공격(功格)과 과율(過律)로 나누어 계수적으로 규격화하여 사과신적 신앙과 연결시킨 것으로, 민중 도덕을 앙양시키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밖에도 우리 선현들에 의한 도교 관계의 저술이 적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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