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방의학은 질병의 발생 원인을 규명하여 그 예방에 중점을 두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주로 신체적·정신적·사회적 질환 및 상해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의학이다. 예방은 1차·2차·3차로 나누어진다. 1차 예방은 질병이나 상해가 발생하기 전에 막는 것으로 예방접종이나 안전장비 제공 등이 이에 속한다. 2차 예방은 조기진단과 개입으로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3차 예방은 감시와 유지를 통하여 질병에 대한 후유증을 최소화시키는 것이다. 예방의 방법으로는 환경위생사업·예방접종·행동변화촉진·식품영양, 유전적 요인 및 그에 대한 위생학적 방법, 세심한 의료 등이 있다.
주로 신체적 · 정신적 · 사회적 질환 및 상해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의학을 말한다. 일반의학이 아픈 자와 상해자를 치료하는 데 주목적이 있는 반면에 예방의학은 그 목적이 예방에 있으며, 그것도 개인지향적이라는 점에서 집단지향적인 공중보건학과 성격을 달리한다.
예방은 1차 · 2차 · 3차로 나누어지는데, 1차 예방은 질병이나 상해가 발생되기 이전에 막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감염병에 대한 예방접종과 위험한 산업장근로자에게 안전장비를 제공하도록 하는 것 등을 지적할 수 있겠다.
2차 예방은 조기진단과 개입을 말하는데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3차 예방은 감시와 유지를 통하여 질병에 대한 후유증을 최소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예방의 방법으로는 환경위생사업 · 예방접종 · 행동변화촉진 · 식품영양, 유전적 요인 및 그에 대한 위생학적 방법, 세심한 의료 등이 있다. 질병을 피하고 건강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리스신화에 의하면 전지전능의 신인 아폴로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Aesculapius)가 의술의 신으로 되어 있으며, 그의 딸 휘게이아(Hygeia)가 건강의 신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위생학을 하이진(hygiene)이라 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으며, 기원전 2세기경에 이탈리아의 의학자 갈렌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질병과 환경을 연결시켜서 생각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의견은 극히 정확하였으며 오늘날의 역학적(疫學的) 사고방식에 크게 영향을 준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올바르게 의학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계절과 그 영향,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하며 마을을 만드는 경우에는 방위(方位) · 풍향 · 일출을 생각해야 하고 사용수(使用水)에 대해서 주의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하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미 배수 및 관개의 구거(溝渠) · 매장제도 · 수육검사(獸肉檢査)가 있었으며 가옥청결법 · 신체섭생법(身體攝生法) 등이 실시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대 인도에서도 음식 · 의복 · 기와(起臥) · 운동 · 목욕 · 신체청결 등에 관한 규정이 있었고, 각자의 규칙적이고 위생적인 생활이 해마다 되풀이되는 감염병에 대한 최선의 예방법임을 알려 주고 있다.
상 · 하수도가 건설되었고 목욕장이 설비되었으며, 시내에서는 사체의 매장이나 소각이 금지되었다. 중세기에 와서는 이탈리아에서의 규정이 주목할 만하다.
즉, 인축(人畜)의 사체부패에 따르는 공기전염을 피하게 하고 불결물제거법 · 급수법 · 식품위생법 · 시가지청결법 · 건축위생법 등의 제정을 고기록(古記錄)에서 볼 수 있다.
중세 말기의 예방법 중 의미 있는 것으로는 방역규정(防疫規定)이 있다. 과밀한 주거, 채광(採光), 환기가 불안전한 가옥, 협소한 가로, 불충분한 배수구, 불량음료수, 비위생적인 사체매장 등에 대한 규정이다. 이 분야가 현저하게 발달한 것은 18세기 말부터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에 파급되어 고대 수공업은 압도되고, 공장을 중심으로 하는 대도시가 발전하여 농촌인구는 노동자로서 도시에 유입되어 자본주의적 경제사회가 확립되었다.
도시의 급속한 발전, 노동자의 비위생적인 집단생활, 교통의 발달 등은 감염병의 유행을 촉진시켰고 건강에 대하여 심각한 위협을 주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생설비나 규칙이 급속하게 만들어졌다.
1866년 독일의 뮌헨대학에서 페텐코퍼(Pettenkofer,M.V.)에 의하여 위생학교실이 최초로 창설되었다. 그의 위생학은 의학의 다른 분야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연구실 내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관계로 19세기 말에 이르자 그의 실험위생학(實驗衛生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일어났고 그 비현실성이 논란되었으며, 노동대중과 보호를 필요로 하는 계급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분야가 탄생하기도 하였다.
뮌헨대학에 이어 라이프치히(1868) · 튀빙겐(1883) · 베를린(1885) 등에서도 위생학강좌가 개설되었다. 영국에서는 공업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대규모 공장이 건설되고 다수의 노동자가 도시에 집중하여, 비위생적인 생활을 하게 되어 건강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런 중에 통계학적 방법이 의학에 도입되어 도시와 농촌에 있어서의 이환율(罹患率:병에 걸린 사람의 비율) · 사망률의 차이가 주목되고, 그 결과 급수 · 배수 · 설비가 발달됨으로써 여러 보건시설이 정비되었다.
1842년에는 공장보건감독 및 노동자 지역의 과도한 밀집주거, 토지 및 물의 오염, 기타의 유해상태를 제거하기 위한 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예방의학의 발달은 미생물의 발견에 의하여 획기적인 전기를 맞이하였다.
감염병의 원인이 미생물에 의한다는 사실이 밝혀짐과 아울러 소독방법이라든지, 식품의 안전한 관리, 예방백신 개발 등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계속 진전되었다.
질병이 미생물에 의함을 처음 과학적으로 증명한 파스퇴르(Pasteur,L.)에 의하여 예방의학에 새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위생개혁운동과 세균학의 발달에 힘입어 각국의 사망률은 20세기 초에 이르자 두드러지게 떨어졌다. 그러나 모자보건이나 결핵문제 등 저소득층이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보건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저소득층에 있어서의 영양실조, 열악한 환경상태, 임산부의 높은 사망률 등은 서구의 모든 나라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것의 대책으로 아동보건 · 모자보건 · 학교급식 등이 본격화되었다.
한편, 19세기 말∼20세기에 들어와 두드러지게 발달된 예방의학 분야 중의 중요한 변화는 영양과학의 중시, 산업보건발달에서 찾을 수 있다.
영양과학의 발달로 탄수화물 · 단백질 · 지방의 3대 영양소 외에 무기염류 · 비타민 등이 생체구성 및 유지에 필수적임이 밝혀지게 되었고, 구루병 · 괴혈병 등이 이들의 결핍으로 생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방의학 지식은 고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扶餘)는 사자(死者)에 인(人)을 살(殺)하여 순장(殉葬)한다. 또는 사후에 후장(厚葬)하는 풍습이 있다. 예(濊)는 호(虎)의 신(神)을 사(祠)한다.”는 것이 보이며, 『춘추』 좌전(左傳)에 “동이(東夷)의 풍습은 인신(人身)을 공생(供牲)하는 제풍(祭風)이 있다.”는 것을 기술하였다.
순장과 후장의 풍습은 사후에 악정(惡精)이 인체에 침범함을 두려워함이며, 호신(虎神)을 사(祠)함은 사나운 호령(虎靈)의 위력을 빌려 체내에 침입하려는 악정을 방지 또는 구축(驅逐)하려는 것이며, 인신공생의 제풍은 요신(妖神) 같은 악정을 위안하여 그 가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므로 질병발생이 악정에 기인된다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악정 이외에 또 예기(穢氣) · 악독(惡毒) 같은 것이 질병발생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짐작한 듯 하다.
즉, 위지 동이전에 “예(濊)는 기휘(忌諱)가 다(多)하여 질병으로 사망함에 곧 구택(舊宅)을 버리고 다시 신택(新宅)을 조(造)한다.”라고 하였으며, 『진서』 사이전(四夷傳)에 “사자(死者)는 즉일(卽日)에 곧 야장(野葬)한다.”고 하였다.
사자가 옛 집을 버리는 것은 사자의 귀신을 기피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사자가 발생한 거실에 주거함으로써 그와 같은 질병에 전염될 수 있음을 두려워함이며, 또한 시체를 곧 야장하는 것은 경험에서 사체의 예독(穢毒)으로 인하여 발생될 수 있는 질병을 방지하려는 의미를 가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상은 정령(精靈)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고, 다른 한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부여는 군사(軍事)가 있음에 하늘에 제사하고 소를 죽여서 발굽으로 보아 길흉을 점치는데, 굽의 해(解)는 흉하고 합한 것이 길하다.”라고 하며, “예는 성수(星宿)를 후(候)함을 효(爻)하여 미리 연세(年歲)의 풍흉(豊凶)을 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하늘에 기도함으로써 질병을 피하고자 함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우제점술(牛蹄占術)이 질병의 예후를 판정하는 데 적용되었으리라는 것은 주보(朱輔)의 『계만총소(溪蠻叢笑)』에 “동중(洞中)이 군사승부(軍事勝負) 및 질병기도(疾病祈禱)에 모두 그 소로써 점한다.”라고 씌어 있는 데에서 짐작된다.
이 사실을 부여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 난점이 있기는 하나, 당시 부여족이 남방만족(南方蠻族)과 같이 군사 이외에 질병 · 기도에 우제점 같은 술법을 적용했을 가능성은 원시심리의 유동성(類同性)으로부터 추상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시아문화의 한 연원으로 생각되는 아시로바빌로니아인에게 성신(星辰)의 운행으로써 유행병의 만연을 예측하고자 하는 점성술과 비슷한 사유형태(思惟形態)가 예족(濊族)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우제점술은 질병의 예후(豫候)를 판정할 수 있는 예방의학적 지식을 태동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위생학적 지식도 고대부터 있어 왔다. 청결과 제예(除穢)의 풍습은 부여의 사체 매장풍습과 백의숭상, 변한인의 의복청결, 고구려인의 그 식(食)에 절도가 있고 청결을 좋아한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지식은 부정(不淨)과 오예(汚穢)를 가장 기피하는 신도적(神道的)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한편 우리 고대사회에 있어서의 선도술(仙道術)도 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생불사를 위하여 불로의 약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편 장수를 위한 양생법이 당연히 요청되었으며 의약과의 관계는 자연 밀접하게 되었으리라고 본다.
예방의학적 지식은 악령구축과 기양적 방법이라 할지라도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남아 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2의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郎望海寺條)에 역신(疫神)과 처용과의 관계가 나오고, 역신을 가무로써 쫓은 처용의 형상으로 감염병을 예방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감염병유행을 파악하고 기양으로써 그것을 풀고자 하였던 전조학적(前兆學的) 예방관은 이 시기에도 보이는데, 정치의 잘못에 대한 견책(譴責)으로서 감염병을 포함한 재이현상(災異現象)이 이해되어 그 해결책 또는 예방 방법으로 형정(刑政)을 보살핀다든지,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든지 하는 대책이 행해졌다.
한편, 이 시기에는 수 · 당 의학의 도교적 영향으로 단(丹)을 만드는 연금술의 발달과 도교의학의 도인(導引) · 안마(按摩) · 조기(調氣) 등의 양생방법과 방중술(房中術) 등이 도입되어 있었다.
예방의학이 하늘에 제사지내고, 서낭제 · 나례(儺禮) 등의 기양적 방법과 감염병으로 죽은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는 전파차단 방법이 정부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방상씨(方相氏)의 가면을 쓰고 귀신을 예방하는 방법(나례)과 도화나무 가지를 이용하여 역귀를 예방하는 방법이 제석(除夕: 섣달 그믐)날 고정적으로 행하여졌다. 이 의식은 비단 궁중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행해졌고, 또한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다.
기양적 방법으로 역귀를 물리치는 방법으로는 서낭신의 위엄이나 정령의 힘을 빌리거나 심지어는 불력(佛力)에 기대해서 『반야경(般若經)』 등을 낭독하기도 하였다.
이 시대는 다원적 사상의 혼합사회임을 반영하여 무속 외에 유 · 불 · 선, 음양 · 참위 · 풍수지리사상까지가 모두 감염병을 예방하는 데 동원되고 있다.
조선시대에서도 예방방법으로 산천에 제사 · 서낭제 · 나례 · 도지축귀(桃枝逐鬼) 등의 방법이 성행하였고, 감염병이 들었을 때에나 또는 정기적으로 여제(癘祭)라는 것을 지냈다. 『대전회통』에 따르면, 연례행사로서의 여제는 서울 북교(北郊)에서 청명 · 단오와 7월 15일에 지내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있어 예방의학으로 중요한 것은 감염병을 피한다는 『벽온방(辟瘟方)』의 여러 차례에 걸친 간행과 민간벽온법(民間辟瘟法)이 발달된 것이다.
『벽온방』은 1518년(중종 13) 김안국(金安國)의 『언해벽온방(諺解辟瘟方)』을 필두로 1525년에 속벽온방으로 알려진 김순몽(金順蒙)의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 1544년에 김안국에 의한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이 간행되었다.
이어 명종 때에는 『황달학질치료방(黃疸瘧疾治療方)』과 『달학이해방(疸瘧易解方)』이 나왔으며, 광해군 때에는 『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과 『벽역신방(辟疫神方)』이 허준(許浚)의 찬(撰)으로 나왔으며, 1653년(효종 4)에는 안경창(安景昌)이 『벽온신방(辟瘟新方)』을 지었고, 그것은 1660년(현종 1)과 1727년(영조 3)에 중간되었다.
조선시대 민간벽온법들로는 각기 달마다 다음과 같은 세시풍속들이 있었다. “정월 납월서(臘月鼠)를 정초 아침에 거처에 묻으면 감염병을 막는다. 입춘 후 경자일(庚子日)에 따뜻한 무청즙(蕪菁汁)을 온가족이 먹으면 시역(時疫)을 다스릴 수 있다. 5월 5일에 쑥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문 위에 안치하면 온역을 막는다. 유월에는 행로(行路)와 음지에 흐르는 샘물을 먹지 말라. 먹으면 학질을 얻는다. 구월에는 생강을 먹지 말라. 먹으면 수명이 짧아진다.
십일월 동지에 얼음이 얼지 않으면 온역이 성행한다. 동지 전후 각 5일간은 별침(別寢)하라. 옛날 공공씨(共工氏)에게 못난 아들이 있었는데 동짓날에 죽어 역귀가 되었다. 이 역귀가 적두(赤豆)를 두려워하므로 이 날 팥죽을 쑤어 먹는다. 십이월에는 저피(楮皮:닥나무 껍질)를 벗겨 뽕나무가지에 얽어 우물 속에 던져 두면 온역을 막는다. 제야(除夜) 사경(四更)쯤에 마자(麻子:삼씨)와 적소두(赤小豆) 각 14립(粒)을 식구들의 머리털과 함께 우물에 넣으면 종세(終歲)토록 상한(傷寒)이나 온역에 걸리지 않는다.” 등이다.
일반 벽온법은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잘 채록되어 있다. 주로 신약(神藥)들의 패용(佩用)과 복용에 관한 내용의 것들이다.
예를 들면, “석웅황(石雄黃)을 차고 다니면 귀신이 가까이 하지 못한다.”거나 “태을류금산(太乙流金散)을 주머니에 넣어 가슴에 차고 문위에 걸어 두며, 또 약간을 푸른 천으로 싸서 뜰에서 태우면 온역을 물리친다.”라는 내용들이다.
칠물호두원(七物虎豆元)이니 노군신명산(老君神明散) · 소합향원(蘇合香元) · 도소음(屠蘇飮) 등이 모두 그것이다. 서양의 예방법은 정조∼ 순조 때에 정약용(丁若鏞)과 박제가(朴齊家)에 의한 천연두에 대한 인두법(人痘法)이 최초이나 이는 당시의 서학(西學) 배척의 정치적 · 사회적 풍토 때문에 보편화되지 못하였다. 정약용의 우두법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항이 되어서야 일본으로부터 우두법을 교육받은 지석영(池錫永)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행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천연두 예방이 가능해졌다. 지석영은 우두법시술에 힘쓰는 한편 1885년에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지어 이론화 작업에도 앞장섰다.
환경위생사업은 개화사상가이자 개혁자였던 김옥균(金玉均) · 박영효(朴泳孝)에 의하여 1882년에 도입, 1883년에 한성에서 잠시 시행되었는데 이는 개화파에 불만을 나타냈던 민비세력 때문에 3개월 만에 단명하고 말았다.
김옥균은 1882년 「치도약론(治道略論)」이라는 글을 써서 환경위생사업으로 감염병을 예방하고, 아울러 길도 트이게 하고 수리된 인분을 비료로 사용해 농업생산성을 높이자는 획기적 이론을 펼치고 있다.
종두법과 환경위생사업 등의 예방사업은 1894년 갑오개혁, 1895년 을미개혁 시 관제개편 때 수용되어 새로운 형태의 예방사업이 제도화되었다.
내부에 위생국을 두고 위생과와 의무과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 그것이다. 위생의 기술적 측면은 위생국에서 담당하였고, 실제집행은 경무과(警務課)에서 행한 이원적인 형태의 것이었다.
이후 그 시행을 위하여 1895년 4월에는 내부령(內部令) 4호로 「호열자소독규칙」이 발포되었으며 계속해서 「호열자예방과 소독집행규칙」 · 「종두규칙」 · 「감염병예방규칙」 · 「장티푸스예방규칙」 · 「적리(赤痢)예방규칙」 · 「발진티푸스예방규칙」 · 「두창예방규칙」 · 「감염병소독규칙」 · 「검역정선규칙(檢疫停船規則)」 등이 반포되고 시행되었다.
그러나 일제에 강점되면서 예방사무도 그들에 의하여 전담되었는데, 그들은 기술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것을 소개하였으나 집행에서는 무단적(武斷的)이었다.
일제 때 예방사업 분야는 상수도관리, 음식물 및 그 용구취체(用具取締), 오예물(汚穢物)소제, 묘지, 화장장 및 매화장(埋火場), 감염병예방, 해항검역, 감염병원(傳染病院), 종두, 지방병, 가축병예방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 집행기관은 한말의 위생국 · 경무국 협동의 체계가 아닌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의 전담이었다.
이곳에서의 주된 감염병관리방법은 무단으로 병자를 색출하여 격리시키는 것이었고, 이는 한국인들이 그 방법을 기피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많은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일제강점기에 감염병관리가 가능하여 사망률이 떨어진 것은 이러한 희생의 대가였다.
오늘날 전공분야로 예방의학은 공중보건학, 사회의학 등과 그 내용이 유사하여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의과대학과 한의과대학마다 예방의학교실을 두고 있다.